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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2에 묻힌 6·13 … 북한 이슈 뜨거울수록 선거는 잊힌다

중앙일보 2018.05.29 01:08 종합 8면 지면보기
서울 탑골공원에서 만난 노종만씨는 ’실망시킨 정치인이 너무 많아 이번 지방선거에선 투표를 안 하겠다“고 말했다. [권유진·정용환 기자]

서울 탑골공원에서 만난 노종만씨는 ’실망시킨 정치인이 너무 많아 이번 지방선거에선 투표를 안 하겠다“고 말했다. [권유진·정용환 기자]

24일 오후 노년층이 많이 모이는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앞 카페. 차를 마시고 있던 노종만(71)씨에게 다음달 13일 지방선거에 대해 묻자 “이번엔 투표 안 한다”고 잘라 말했다. “그동안 뽑아줬더니 실망시킨 정치인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맞은편에 있던 이규정(73)씨는 “동네에서 몇 번 명함을 받기는 했는데 선거 날이 언제인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카페 옆자리에서 노트북으로 작업을 하던 사진가 정재훈(29)씨는 “6월 13일이 빨간 날인 건 아는데 현충일인 줄 착각했다”며 민망하게 웃었다.
 

길에서 만난 유권자들 썰렁한 반응
탑골공원 70대 “뽑아줘도 실망만”
신촌 20대 “투표해도 뭐가 바뀌나”
40대 주부 “정상회담 뉴스만 나와”

“빨간 날이긴 한데 무슨 날” 묻기도
“누가 나오는지 몰라도 투표는 할 것”

지방선거가 실종 상태다. 29일로 지방선거가 15일밖에 남지 않았지만 전국적으로 선거 열기를 느끼긴 어렵다. 지방선거가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총선에 비해 관심도가 떨어진다는 측면도 있지만, 1차적으론 연일 터져나오는 메가톤급 외교안보 이슈 때문에 유권자들이 선거에 시선을 돌릴 여유가 없는 듯했다.
 
◆북핵에 가려진 지방선거=25일 여의도에서 만난 금융업체 직원 하모(28)씨는 “뉴스에서 북한이 워낙 큰 이슈이다 보니 선거는 별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없다”며 “지역 정치인은 신뢰도 잘 안 가고 내 삶에 영향을 주는 건 주로 국가 정책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보험사에 다니는 김태민(28)씨도 “북핵 문제하고 드루킹 사건 때문에 선거가 낄 자리가 없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주부 박현선(41)씨는 “주로 라디오로 뉴스를 접하는 편인데 요즘 라디오에서 매일 정상회담 얘기만 나오지 지방선거 얘기를 들어본 기억이 없다”고 말했다. 대기업 직원인 조모(45)씨는 “북·미 정상회담이 선거 전날이라고 하던데 투표 전날까지도 온통 관심이 북한으로 쏠릴 것 같다”고 말했다.
 
사진가 정재훈씨는 공휴일인 선거일을 현충일과 헷갈렸다며 겸연쩍어했다. [권유진·정용환 기자]

사진가 정재훈씨는 공휴일인 선거일을 현충일과 헷갈렸다며 겸연쩍어했다. [권유진·정용환 기자]

보다 근본적으로 지방선거 자체에 대한 회의를 표시하는 이도 적지 않았다. 서울 신촌 거리에서 만난 취업준비생 서유정(25)씨는 “정치까지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다. 내가 투표해도 뭐가 달라지겠나 하는 생각도 든다”며 바쁘게 지나갔다. 소해영(66)씨는 “설령 내가 찍은 사람이 당선돼도 그 사람이 내 말을 듣는 게 아니라 자기 맘대로 하니까 의미가 없다. 누가 돼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영등포 타임스퀘어에서 만난 이모(69)씨는 “대통령 한 명 고르는 것도 쉽지 않은데 지방선거는 투표지가 7장이라는데 도대체 어떻게 그 사람들을 일일이 알고 찍을 수가 있느냐”고 말했다. 탑골공원에서 만난 사진가 정씨는 “총선·대선은 투표를 다 했지만 이번엔 별로 할 생각이 없다”며 “요즘 인터넷을 보면 진보는 상대방은 틀리고 자기들은 무조건 옳다고 하고, 자유한국당 쪽은 종북몰이 말곤 별로 프레임도 안 보이고 해서 정치에 염증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정치 얘기를 물으면 대뜸 화부터 내는 시민들도 있었다. 지난 22일 경남 진주에서 식사를 하는 중년 남성들에게 도지사 선거에 대해 물었더니 “밥 맛 떨어지게 정치 얘기 꺼내냐”고 짜증을 냈다. 경남 양산 통도사에서 만난 한 여성은 “선거철에 여론조사업체 전화 좀 안 왔으면 좋겠다”며 인상을 찌푸렸다.
 
◆인물도 모르고 정책도 모른다=후보 인지도도 심각할 정도로 낮았다. 그나마 광역단체장 후보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기초단체장으로 내려가면 후보 이름을 아는 사람조차 거의 없었다. 과거 지방선거에서 뜨거운 논쟁을 유발했던 무상급식과 같은 쟁점도 없다. 주부 이희경(34)씨는 “원래 선거 때 애 엄마들끼리 모이면 보육정책 같은 걸로 얘기를 나누고 했는데 이번엔 전혀 그런 게 없다. 어느 후보가 무슨 공약을 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회사원 엄경혜(26)씨는 “공약이나 정책을 따로 찾아본 적은 없고 집에 선거 공보물이 오면 투표하기 전에 한번 훑어 보려고는 한다”고 말했다.
 
서울 영등포구에 사는 설모(왼쪽)씨는 ’영등포 구청장 후보들 이름을 다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권유진·정용환 기자]

서울 영등포구에 사는 설모(왼쪽)씨는 ’영등포 구청장 후보들 이름을 다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권유진·정용환 기자]

결국 후보 개인을 판단할 근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정당기호만 보고 찍는 ‘묻지마 투표’가 될 가능성이 커 보였다. 택시기사 서영실(66)씨는 “다 그놈이 그놈인데 당을 보고 찍어야지 별수 있겠느냐”며 “후보 때는 열심히 하겠다고 하더니 다들 시장·지사 되고 나더니 고집부리고 교만해지더라”고 열을 올렸다. 신촌에서 만난 대학원생 박유정(26)씨도 “투표는 하겠지만 그 많은 후보가 누가 누군지 모르니 그나마 덜 싫어하는 정당 후보들을 뽑으려 한다”고 말했다. 서울 영등포구의 한 백화점 앞에서 전단지를 나눠주던 이재일(69)씨는 “투표는 늘 해 왔고 이번에도 하겠다”며 “누가 나온지도 잘 모르지만 좋아하는 정당 찍어줄 것”이라고 답했다. 최창렬 용인대 교양학부 교수는 “지방자치단체가 중앙정부에 너무 종속돼 있기 때문에 지역 정치에서 어떤 효능감을 얻을 수 있는지 시민들이 경험해본 적이 별로 없다”며 “각자 사는 지역의 구청장·시의원·구의원 등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른 채로 투표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환경미화원 오철환씨는 ’투표용지에 모두 일곱 차례 기표를 해야 하는데 일일이 알 수 없어 소속 정당을 보고 뽑겠다“고 말했다. [권유진·정용환 기자]

환경미화원 오철환씨는 ’투표용지에 모두 일곱 차례 기표를 해야 하는데 일일이 알 수 없어 소속 정당을 보고 뽑겠다“고 말했다. [권유진·정용환 기자]

◆그래도 투표는 하겠다는데=시민들은 지방선거에 관심은 별로 없지만 선거일에 투표장에 나갈 것인지 묻는 질문에는 대부분 “투표는 할 것”이라고 답했다. 할인마트에서 일하는 김석(39)씨는 “집이 인천인데 아직 누굴 찍을지는 결정 안 했지만 오전 11시까지 출근하면 되니까 그 전에 투표는 꼭 하고 올 것”이라고 말했다. 광화문 근처에서 근무하는 이장수(33)씨는 “원래 투표를 잘 안 했는데 탄핵 정국 때 출퇴근 길에 촛불집회를 자주 본 뒤로 선거는 꼭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선거에 관심이 없다면서도 투표는 꼭 한다는 ‘모순적’ 반응에 대해 전문가들은 “투표가 민주시민의 의무라는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나오는 모범답변”(신율 명지대 정외과 교수)이라고 분석했다. 말이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보수층에선 기권 의사를 드러내는 경우도 적잖았다. 자유한국당 지지자였다는 택시기사 유모(71)씨는 “투표를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선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털어놓았다.
 
송승환·정용환·권유진 기자 song.seunghw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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