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예영준의 차이 나는 차이나] 연안파 숙청 때 북·중 최악 … 김일성, 마오 만나 일거 타결

중앙일보 2018.05.28 00:51 종합 21면 지면보기
한반도 정세의 급변 속에 과거 6년간 얼어붙었던 북·중 관계가 빠르게 복원되고 있다. 단순한 복원이 아니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의구심을 드러낼 만큼 전략적으로 밀착하는 모양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큰 맘 먹고 보낸 특사조차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못 만나고 돌아선게 불과 6개월전의 일이다. 지금은 중국의 개혁개방을 벤치마킹한다며 구한말 신사유람단을 연상케 하는 노동당 대표단을 보낼 정도가 됐다. 이 모든 일의 시초가 3월말 김정은의 전격적인 방중에 있음은 두 말할 나위 없다. 북·중 관계를 돌이켜보면 좀처럼 풀릴 것 같지 않던 대립과 갈등을 최고지도자들의 만남으로 일거에 청산한 사례가 적지 않다.
 

역대 정상회담 통해 본 양국 관계

 
문혁 대립, 저우언라이 방북 뒤 해소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1956년 북한의 ‘8월 종파사건’에 대한 보고를 받은 마오쩌둥(毛澤東)의 격노는 하늘을 찔렀다. 최창익 등 연안파는 스탈린 격하운동의 바람을 타고 이 해 8월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김일성 비판에 나섰다는 이유로 출당조치를 당했다. 김두봉을 필두로 하는 연안파는 중국 공산당과 함께 중국 대륙에서 항일운동과 공산혁명에 투신하다 귀국해 북한 정권 수립에 가담한 세력을 말한다. 마오는 6·25 참전 중국 인민지원군(중공군) 사령관을 지낸 펑더화이(彭德懷)를 소련 정치국원 미코얀과 함께 평양에 보내 출당 철회를 요구했다. 하지만 김일성은 펑이 돌아간 뒤 이를‘내정간섭’으로 단정하고 전례없는 대대적 숙청극을 벌였다. 북·중 관계는 일거에 싸늘해졌다.
 
이듬해 1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러시아 혁명 40주년 기념대회에 사회주의권 정상들이 총집결했다. 이 틈을 빌어 두 차례 따로 만난 마오와 김일성은 8월 종파사건의 앙금을 털어버렸다. 김일성은 한국전쟁 이후 남아있던 중공군의 철수를 요구해 관철시켰다. 연안파가 중공군을 등에 엎고 자신의 권력에 도전할지 모른다는 오랜 불안을 마침내 해소한 것이다. 이후 북·중 관계는 장기 밀월에 들어간다.  
 
1965년 중국 문화대혁명의 광풍은 북한에까지 불어닥쳤다. 기세등등한 홍위병은 김일성을 수정주의자로 몰아붙이고 체포령이 적힌 대자보를 써 붙였다. 압록강변에서는 연일 김일성 비판 방송을 틀었고 북한도 맞비난에 나섰다. 압록강·두만강 변엔 보를 높이 세우고 국경을 통제했다. 북·중 교류는 완전히 단절됐다.
 
 
한·중수교 갈등 김정일 방중 뒤 풀려
 
 
1970년 4월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총리가 평양 공항에 내렸다. 북한은 환영 군중에게 “환영은 하되 너무 열렬하게 하지 말라”며 손을 드는 높이까지 통제하며 수위조절을 했다. 하지만 김일성과 저우가 만나는 순간 모든 것이 풀렸다. 김의 첫마디는 “혁명을 하면 당신들끼리 할 일이지 왜 나한테까지 그러냐”는 푸념이었다고 전해져 온다.
 
북·중 관계의 사상 최대 위기는 1992년 한·중 수교였다. 북한의 배신감은 극에 달했다. 사회주의권 붕괴와 경제난이 이 시기와 겹쳤고 북한은 중국의 도움 없이‘고난의 행군’으로 버텼다. 8년 단절을 깨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베이징에 나타나 장쩌민(江澤民) 주석과 회담한 것은 2000년 5월이었다.
 
김정일의 1차 방중은 김정은의 지난 3월 방중과 공통점이 있다. 우선 김정일이 2000년 6월 김대중(DJ)과의 사상 첫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중국을 찾았다는 점이 그랬다. 그 뒤 북한은 오랜 고립을 깨고 남북관계는 물론 미국과도 화해를 모색해 조명록 차수의 방미와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방북으로 이어졌다. 국제사회와의 새로운 관계 설정을 앞두고 중국을 먼저 찾아 묵은 갈등을 털었다는 점은 김정은이 아버지 김정일의 사례에서 배운 것이라 할 수 있다.
 
김정일은 8년, 김정은은 6년 이상 이어진 장기간의 경색을 풀었다는 점도 비슷하다. 이후 김정일은 2011년 사망전까지 모두 9차례 중국을 찾았다.
 
 
김정은 방중, 2000년 김정일과 닮아
 
 
진징이(金景一) 베이징대 교수는 “혈맹이란 말때문에 북·중 관계가 늘 좋았던 것처럼 생각되지만 사실은 냉각기와 밀월기를 반복하는 부침이 있었다”며 “하지만 지도자간의 만남 한 번으로 일거에 관계를 복구시키곤 한 게 북·중 관계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우선 두 나라 공통의 일당지배 정치시스템을 그 이유로 들 수 있다. 최고지도자의 결정이 당의 지침이자 국가의 정책이 되는 시스템에서는 외교관계 역시 최고지도자의 결단에 의존하는 비중이 높기 때문이다.
 
또한 북·중 간의 역사적 특수성을 부인할 수 없다. 과거 양국 지도자들이 전장에서 함께 고락을 같이하며 동지애와 전우애로 다져진 관계다. 북·중 특수관계를 거론할 때 등장하는 말이 순망치한(脣亡齒寒)이다. 시진핑 주석 역시 김정은의 다롄(大連) 방문때 같은 말을 했다. 결국 두 나라는 필요할 때 언제든 편리하게 꺼내 쓸 수 있는 ‘피로 맺어진 전통우의’란 자산을 보유하고 있는 셈이다.
 
순망치한이란 말 속에는 역사적 인연 뿐 아니라 지정학적 관계까지 포함되어 있다. 앞서 예를 든 정상회담 사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북·중 관계에서 급전환이 일어난 가장 중요한 요인은 전략적 이해관계다. 여기엔 북·중 각각의 내부 사정 뿐 아니라 외부 정세 변화도 크게 작용했다. 시진핑-김정은 시대의 북·중 관계도 변화가 없을 것이다. 김정일 시대 북·미의 짧은 만남은 조지 W 부시 행정부 이후 2차 핵위기 발발로 물거품이 됐고 그 뒤 중국은 북한이 유일하게 기댈 곳이나 마찬가지였다. 북·미 담판에 앞서 북·중 관계를 다진 김정은에게 어떤 앞날이 기다리고 있을지 주목된다. 
 
예영준 베이징 특파원 yyjune@joongang.co.kr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