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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크통 냄새의 추억, 향수를 만들다

중앙선데이 2018.05.26 02:00 585호 20면 지면보기
코냑 명가 헤네시의 12세손 킬리안 헤네시
코냑을 대표하는 브랜드 ‘헤네시’의 창업자 리처드 헤네시의 12세손. 할아버지는 샴페인 브랜드 모엣 샹동을 인수, 루이비통과 합병해 럭셔리 그룹 LVMH(루이비통모에헤네시)를 세운 제왕이었다. 킬리안 헤네시(Kilian Hennessy·46), 그는 이름만으로 왕관의 무게를 견뎌야 했다. 세상은 그의 인생 여정을 제멋대로 가늠했다. 무엇을 해도 헤네시라는 이름이 방패가 돼 줄 거라고, 금수저를 문 채 평탄한 길을 걸을 거라고.  
 
하지만 그는 홀로서기를 택했다. 2007년 자신의 이름을 단 브랜드 ‘킬리안’을 만들었다. 그것도 코냑이 아닌, 향수였다. 16일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 내 단독매장 오픈을 기념해 방한한 킬리안은 “헤네시보다 더 큰 이름으로 남고 싶다”는 포부를 숨기지 않았다.  
 
“저희 브랜드는 킬리안 헤네시가 아니라 킬리안입니다.” 그는 정중하면서도 단호하게 첫 질문의 말 실수를 바로 잡았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서슴없이 꺼내면서도 “한 번도 가업을 이어 받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어릴 적부터 어딜 가도 ‘헤네시니까’라는 이야기를 듣는 게 싫었단다. “내 이름으로 살고 싶어” 실력을 증명하려 애썼다.  
 
킬리안 향수에는 독특한 제목이 달린다. 클림트 작품에서 영감을 얻 은 ‘Woman in Gold’

킬리안 향수에는 독특한 제목이 달린다. 클림트 작품에서 영감을 얻 은 ‘Woman in Gold’

가업과는 일부러 ‘거리두기’를 했다. 1995년 조향사로 첫 발을 딛었던 디올을 제외하곤 LVMH의 우산을 벗어나 파코라반-알렉산더 맥퀸-조르지오 아르마니에서 경력을 쌓았다. 2016년 킬리안을 인수한 회사도 뷰티 업계에선 LVMH의 라이벌인 에스티로더 그룹이었다.    
 
그럼에도 가문의 일원임을 부인할 수 없는, 유년의 기억은 남아 있다. 그가 열 살까지 살았던 프랑스 샤렁트 지역, 거기엔 헤네시의 성과 지하창고가 있었다. 어느날 할아버지가 어린 손자를 그곳으로 데려갔다. “알코올 특유의 냄새와 달달함이 베어나는 코냑 오크통의 향은 그때까지 전혀 맡아 보지 못한 강렬한 냄새였어요. 얼마나 인상적이었던지 후에 비슷한 향의 향수를 만들었죠.”  
 
이브의 선악과가 모티브가 된 ‘Good Girl Gone Bad’

이브의 선악과가 모티브가 된 ‘Good Girl Gone Bad’

코냑 오크통으로부터 시작된 향과의 인연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언어와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한 그는 당시 ‘향의 의미론’이라는 주제로 논문을 준비하며 조향 학교에 등록했다. ‘코의 훈련’이라는 수업에서 3000개 가까운 에센스 향을 접했을 때 이걸 다 배우려면 쉽지 않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막상 병을 끌어당기자 스스로 놀랄 만큼 반전이 나타났다. “첫 수업, 첫 1분에 에센셜 오일의 원료 향을 바로 알아챘죠. 그때 향수가 저의 큰 세상이 될 것을 직감했어요.”  
 
그는 향수와 위스키가 별반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원료도 비슷한데다 톱-미들-베이스 노트의 조합이라는 것도 같아요. 단지 숙성을 하느냐 안 하느냐의 차이일 뿐이죠. 코냑은 숙성할수록 깊어지는 부드러움이 있는데, 향수는 실제 숙성을 해 보니 꽝이 되더라고요.”  
 
검은 해골을 심볼로 삼은 ‘Black Phantom’

검은 해골을 심볼로 삼은 ‘Black Phantom’

12년 간 다양한 패션 하우스에서 조향사로 일하던 그가 자신의 브랜드를 론칭한 계기도 따지고 보면 헤네시 가문을 빼놓고 생각할 수 없다. “어릴 적부터 집안에서 늘 듣던 말이 있었죠. ‘최고가 아니라면 타협하지 마라, 품질만큼은 양보하지 마라, 우리 고객은 최고의 코냑을 마실 자격이 있다’. 그런데 패션 브랜드가 만드는 향수는 그렇게 하기가 힘들었어요. 메인 상품인 가방·옷을 위한 ‘금고’가 돼야 했고, 자체 조향사가 아니라 다른 업체에 맡겨 만드는 경우도 많았죠. 제품 하나에 향은 물론이고 용기 디자인·광고까지 너무 많은 의견이 반영되다보니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향수를 만들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단호하게 조향사를 접고 패션 디자이너로의 전업을 결심했다. 그러던 어느날, 저녁을 먹으러 간 레스토랑에 연결된 작은 박물관에 들른 게 전환점이 됐다. 그곳에서는 100년 전 제작된 바카라 향수병을 전시하고 있었다. 번쩍 깨달음이 왔다. “100년 전에 향수는, 향수병은 저렇게 예술이고 작품이었는데 내가 만든 건 뭔가라는 부끄러움이 들었죠. 명품이란 바로 저런 거구나 싶었어요.” 그 작은 공간에서 두 시간이나 머물며 향수에 대한 열정을 다시 지폈다.  
 
킬리안은 조향 전 완벽한 스토리 구상을 끝낸다. 이를 위해 회화· 음악·문학 등 다방면에서 아이디 어를 얻는다.

킬리안은 조향 전 완벽한 스토리 구상을 끝낸다. 이를 위해 회화· 음악·문학 등 다방면에서 아이디 어를 얻는다.

킬리안에게 럭셔리란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 그러면서도 현대적 감각을 더하는 한 수가 빛나는 존재다. 최고의 원료는 물론이고 다 쓰면 버리게 되는 향수병부터 달리 했다. 사각의 나무로 만든 케이스를 만들어 그 안에 병을 넣었다. 케이스만으로도 평상시 클러치로 쓸 수 있을 만큼 공을 들였다. 보디로션도 화려한 케이스를 분리, 리필 용기만 구입하면 오래 쓸 수 있도록 고안해 냈다.  
 
무엇보다 ‘영원한 향수’가 되기 위해서는 좋은 스토리가 필수이기도 하다. 그래서 킬리안 향수의 제작 방식은 독특하다. 어떤 인물의 스토리가 머리에 그려지기까지 향을 정하는 일은 없다. 그것은 마치 대본 없이 영화를 찍는 일과 같다는 이유에서다. 대신 각종 사진·단어·옷감·컬러칩 같은 걸 모아 ‘무드 보드(Mood Board)’를 마련한 뒤, 주제를 정해 본능적으로 느끼는 감각에 따라 딱 맞아떨어지는 요소들만 남겨두는 식이다.  
 
국내에 출시된 8개 컬렉션 23개 제품 역시 이러한 스토리를 압축한 제목이 달려 있다. 가령 ‘Good Girl Gone Bad(타락한 여인)’ ‘Straight to Heaven(천국으로의 직행)’ 등이다. 전자의 경우 선악과를 따 먹은 이브를 모티브로 삼았고, 후자는 19세 프랑스 시인 랭보의 작품 한 구절이 영감이 됐다. 브랜드 창립 10주년 기념 라인인 ‘From Dusk till Dawn(황혼에서 새벽까지)’ 역시 화가 구브타브 클림트의 작품 속에서 표현되는 금의 질감을 적용시켰다. 어둠과 빛, 여성과 남성의 대조를 표현했다고 한다.  
 
그의 남다른 조향은 과거 몸 담았던 알렉산더 맥퀸의 컬렉션 작업과 거의 흡사하다. 디자이너가 표현하고 싶은 ‘느낌적 느낌’을 언어로 구체화한다는 의미에서다. “향을 이해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니까요. 음악도 7개의 음으로 만드는데, 향은 수 천 개의 조합이에요. 향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면 더 흥미롭지 않나요.”  
 
글 이도은 기자 dangdol@joongang.co.kr 사진 신인섭 기자·킬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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