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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꺼야 할 때

중앙선데이 2018.05.26 02:00 585호 27면 지면보기
an die Musik: 속리산 계곡이 들려준 것
속리산 계곡의 비로산장. 소박하고 정갈한 산중 쉼터다.

속리산 계곡의 비로산장. 소박하고 정갈한 산중 쉼터다.

5월 초 연휴에 충북 보은 속리산의 깊은 계곡을 노닐었다. 이 땅 수많은 산의 능선과 계곡을 빠짐없이 순례해 이제 산사람을 지나 도인의 경지에 다다른 형이 불러 준 덕분이었다. 네 살 터울로 같이 나이 들어가지만, 형에게 나는 영원히 걱정스런 막내일 뿐이다. 법주사는 30년 만이었다. 옛 시멘트 불상을 기억하는 눈에 금빛으로 번쩍이는 청동 미륵불은 너무 화려했고, 팔상전은 옛날보다 아담해 보였다.  
 
비가 간간이 뿌렸지만 오히려 좋았다. 절 구경을 마치고 계곡에 들어서자 연둣빛 신록의 숲에 사람이라곤 없었다. 속리산은 절이 들어서기에 어울리는 이름이다. 속(俗)을 버리고(離) 불도에 입문한 산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편안하게 닦은 길을 따라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니 나도 번잡한 속세를 영영 떠나는 것 같아 마음이 새털처럼 가벼워졌다.  
 
산 속으로 길을 재촉하는데 형이 탄성을 질렀다. “아! 꽃이 피었네!” 길가의 바위틈을 비집고 나온 여린 줄기가 작고 하얀 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름이 참 재미있어. 매화말발도리.”  
 
형은 산의 나무·풀·꽃을 훤히 꿰고 있다. 산행하다 잠시 숨을 고를 때는 주변의 나무들을 가리키곤 한다. “이건 서어나무, 줄기가 사람의 단단한 근육 같지. 저건 층층나무, 가지가 옆으로 뻗은 모습이 일층 이층 삼층 같잖아.” 덕분에 나도 웬만한 식물은 아는데, 매화말발도리는 처음이었다. 빗물을 머금고 고개 숙인 꽃을 가만히 들추며 형이 말했다. “이 녀석은 참 이상해. 푹신한 흙을 마다하고 단단한 바위틈에 힘겹게 뿌리를 내려.”
 
한 시간쯤 걸어 숙소에 도착했다. 비로산장이다. 고 김태환 옹이 1965년에 지은 산중 쉼터로, 민간산장이지만 국립공원에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지금은 딸 은숙씨가 운영한다. 유쾌한 그녀는 우리에게 별채를 내주며 ‘VIP룸’이라고 했다. 뒷문을 여니 툇마루가 있고 그 앞에 그림 같은 계곡이 펼쳐졌다.  
 
산장 처마 아래에 붓글씨 액자가 줄지어 걸려 있다. 옛 주인은 서예에 능했다고 한다. 明鏡止水(명경지수), 觀水洗心(관수세심)의 필획에 맑은 기운이 서려 있다. 추사의 명품 竹爐止室(죽로지실)의 모각도 한 점 걸려 있다. 산중 처소에 묵향이 그윽하다.
  
그러나 개인이 운영하는 산 속의 집이 안락하기는 힘들다. 손바닥만 한 방엔 얇은 이불만 놓여 있다. 수도승의 방도 이렇진 않을 것이다. 세수도 찬물에 해야 한다. 식사 제공을 하지 않으며, 라면을 끓이면 설거지는 직접 해야 한다. 쓰레기는 당연히 가져가야 한다. 이런 곳에는 어떤 사람들이 올까. 편안한 곳을 피해 바위 절벽에 뿌리를 내리고도 향기로운 꽃을 피우는 매화말발도리, 그 꽃을 닮은 사람들?  
 
마당에 전나무 두 그루가 높이 솟았다. 느티나무, 상수리나무는 모두 구불구불한데 전나무는 조금도 뒤틀리지 않고 하늘을 향해 꼿꼿하게 자랐다. 어깨동무를 하듯 가까이 붙어선 둘은 하나는 굵고 하나는 조금 가늘어 형제 같다. 그들을 보며 형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둘이 꽉 껴안고 있네.”  
 
산에 어둠이 내리니 할 일이 없다. 일찌감치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다. 버릇처럼 스마트폰을 켜고 유튜브를 검색했다. 어떤 음악이 이곳에 어울릴까. 마리아 조앙 피레스의 슈베르트 즉흥곡을 골랐다. 그러나 어두운 방 안에는 언제부턴가 다른 음악이 울리고 있었다. 그것은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였다.  
 
슈베르트를 끄고 뒷문을 조금 열자 물소리가 폭포처럼 방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단조롭고 끊임없는 그 음악은 곧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잠으로 나를 인도했다. 얼마나 잤을까. 푸른빛이 도는 창호를 밀치자 전나무 꼭대기에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
 
글 최정동 기자 choi.jeongd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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