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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수많은 사람의 땀과 열정이 그곳에

중앙선데이 2018.05.26 02:00 585호 24면 지면보기
영화 ‘파리 오페라’에 비친 극장의 빛과 그림자
 
 지난주 개봉한 영화 ‘파리 오페라’는 극장이 공연을 완성해가는 치열한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파리 오페라 극장의 2015-16 시즌을 오롯이 따라가며 극장 운영의 이모저모를 비추는 백스테이지 투어이자, 2015년 파리 바탕클랑 극장 테러 이후 잠시나마 공포와 경계의 공간으로 여겨지며 폐쇄되기도 했던 극장과 극장 종사자들에게 바치는 헌사기도 하다. 2012년부터 지난해까지 국립극장장을 역임하며 레퍼토리 시즌제 도입과 콘텐트의 과감한 혁신 등 국립극장 도약을 이끈 안호상 홍익대 공연예술대학원장이 영화를 감상한 소회를 보내왔다.  편집자 주
 
쇤베르그 오페라 ‘모세와 아론’ 무대에 쇤베르그 음악으로 훈련 받은 살아있는 흰 소를 올렸다.

쇤베르그 오페라 ‘모세와 아론’ 무대에 쇤베르그 음악으로 훈련 받은 살아있는 흰 소를 올렸다.

영화의 주인공은 350년 동안 세계 정상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파리 오페라 극장(Opera national de Paris)이다. 조연은 스테판 리스너(Stephane Lissner) 극장장, 그리고 파리 오페라에 종사하는 모든 예술가와 스태프들이다.
 
영화는 리스너 극장장이 2015/16시즌 프로그램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과감한 예술적 도전을 선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는 극작가와 무대감독을 시작으로 파리의 주요 극장 행정감독, 스페인과 오스트리아 축제 감독을 거친 제작자 겸 극장 경영인이다. 올랑드 정부가 들어선 2012년 10월 니콜라스 조엘의 후임으로 파리 오페라 극장장에 내정돼 2014년 8월 이태리 라스칼라 극장장직을 내려놓고 공식 부임했다.  
 
리스너는 초기 변화의 동력을 찾는데서 노련한 경영자의 면모를 보여준다. 파리 오페라만이 내세울 수 있는 차별화된 가치, 즉 가르니에와 바스티유라는 두 개의 극장을 가진 것과 발레단을 가진 오페라 극장이란 점을 강조한다. 출발부터 ‘춤과 음악’이 함께하는 것이 이 극장의 본질이었다는 것이다. 로열 오페라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도 발레단을 갖고 있지만, 오페라와 발레가 서로 독립되어 있다는 점이 다르다. 연간 시즌의 발레 작품 수에서도 파리 오페라가 압도적이다.  
 
극장장은 15/16시즌 발표에서 신작 오페라 9편과 신작 발레 8편 뿐 아니라 극장 초연작으로 쇤베르그의 ‘모세와 아론’을 공연한다고 발표해 주목 받는다. 평소 파리 오페라의 신작 편수를 두 배 가까이 늘리는 것인데, 이는 극장 운영에 변화를 주겠다는 선포와도 같다.  
 
국립극장도 신작을 늘리고 다양한 성향의 작품으로 변화를 꾀했었다. 그러다보니 늘 주역만 하던 단원들 말고도 뉴페이스들이 대두하게 됐다. 아무래도 새로운 경향에는 젊은 단원들의 적응이 앞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변화를 불편해 하는 단원들도 있게 마련. 늘 주역을 독차지하던 단원들일수록 더 그랬을 것이다.  
 
리허설 중인 댄서

리허설 중인 댄서

영화배우 나탈리 포트만의 남편으로 세계 예술계의 화제 속에 발레단 예술감독으로 취임한 뱅자맹 밀피예가 2년도 못 견디고 떠나야 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영화에는 그가 20명만 출연하는 작품을 만들어 단원들의 불만을 사는 장면이 나온다. 어쩌면 우리 국립무용단과 그리 꼭 닮았을까. 현대의 무용 제작 경향은 기동성과 경제성을 높이는데 포커싱하고 있다. 대체로 한 작품에 출연자가 15명을 넘지 않는다. 우리도 해외 투어를 염두에 두고 컴팩트한 작품을 만들려고 하니 여기저기서 단원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변화 초기 단원들의 관심은 누가 선택받느냐는 것뿐이었다. 파리 오페라 발레에서도 똑같은 장면이 재현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파리 오페라 극장이 밀피예를 예술감독으로 선임한 데는 이유가 있다. 전통만 고집하는 단원들에게 변화를 역설할 전도사가 절실했던 게다. 밀피예가 떠난 후 시즌 라인업이 네오 클래식위주로 바뀌는 아이러니를 보면, 어쩌면 그는 처음부터 변화의 전도사가 아닌 순교자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파리 오페라 변화의 순교자, 뱅자맹 밀피예
영화의 중심축은 오페라 ‘모세와 아론’ 제작과정과 오페라 아카데미 오디션에 뽑힌 러시아의 젊은 바리톤 미하일 티모셴코의 음악적 도전과 성장 스토리다. ‘모세와 아론’은 1년이란 긴 연습일정과 100명이 넘는 대규모 합창과 오케스트라, 흰 소를 무대에 세우기 위해 상상 이상의 노력을 기울인다. 이런 작품을 굳이 무대에 올리는 진짜 의도는 뭘까. 심지어 테러 이후 민감한 이스라엘 소재인데 말이다. “이 작품을 택한 건 코러스와 오케스트라가 주인공이기 때문”이라는 게 극장장의 말이다.  
 
구성원 모두가 주인공이 되는 극장. 영화 곳곳에서 극장에 대한 그의 이같은 철학이 보인다. 바스티유 자리에 오페라극장을 새로 지은 것이 돈 많은 일부 특권층이 아니라 모든 국민에게 오페라를 돌려주자는 미테랑 정부의 야심에서 비롯되었다면, 리스너는 이 정신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는 셈이다. 그는 이사회에 맞서 티켓값 인하를 주장하고, 정부의 감원요구에 분개해 맞서기도 하며, 노조가 5개 초연작에서 파업을 통보하자 이를 2작품으로 협상하는 유연함을 발휘하기도 한다. 극장이란 곳이 밖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화려하고 녹록한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1년 여 심혈을 기울인 ‘모세와 아론’ 초연이 다가왔다. 공연 시작 전까지 무대 곁에서 개막을 진두지휘하던 극장장은 정작 공연이 시작되자 객석이 아닌 자기 방으로 들어가 모니터로 공연을 관람한다. 카메라 앵글에 그의 긴장이 그대로 묻어난다. 언제라도 비상 상황이 생길 것만 같은 불안감에 차마 객석에 자리를 잡을 수 없는 것이다.  
 
리스너 극장장의 직업적 본능은 영화 초입에 대통령 옆자리를 누구로 할까 고민하는 장면에서 이미 확인됐다. 본인은 비상시 밖으로 나가야 되니 대통령 옆에 앉을 수 없다고 하는 장면은 그가 무대 매니저부터 전기공까지, 극장의 실무를 바닥부터 다진 인물임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고 있다.  
 
바그너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공연 모습

바그너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공연 모습

극장장에서 청소부까지, 모든 국민의 놀이터
바탕클랑 극장의 테러는 필자에게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국립무용단이 칸 댄스페스티벌에 초청받아 출발을 준비하던 중 테러가 발생했다. 그 페스티벌의 예술감독은 파리 오페라 발레의 뱅자맹 밀피예의 전임인 브리짓 르페브르였다. 주변의 염려가 적지 않았으나 계획대로 축제를 진행하려는 감독의 의지가 확고했다. 영화 속 전 직원의 묵념에 “극장이란 테러리스트 따위가 넘볼 수 없는 수많은 이들의 땀과 열정이 모이는 신성한 공간이다”라는 선포가 메아리치듯, 당시 칸 페스티벌의 분위기도 결연했다.  
 
필립 조르당 음악 감독

필립 조르당 음악 감독

영화가 보여주려는 또 다른 주제는 미래의 주인공들이다. 젊음과 패기의 필립 조르당 음악감독이 바그너 오페라 연습에서 프랑스 성악가들에게 R발음을 교정하느라 혼신을 다하는 장면, 또 엔딩에서 발표회를 갖는 미하일 티모셴코와 음악교육 프로그램을 마치며 바이올린과 첼로 합주로 베토벤 교향곡 7번 2악장을 연주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화면 가득 담아내며 이들이 바로 극장의 미래임을 강하게 암시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청소부들이 로비와 객석, 극장장실 등을 청소하는 모습은 이 극장이 모든 국민의 것이고 매일 밤 이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곳이란 메시지로 여운을 남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영화가 음악 다큐멘터리라는 점이다. 장 스테판 브롱 감독이 “매일밤 공연을 두고 무대 뒤에서 벌어지는 갈등을 여과 없이 보여주면서 음악이 선사하는 에너지와 환희를 그려내고자 했다”고 했듯, 영화는 매 장면 공연의 하이라이트를 객석과 무대에서 포착하면서 음악적 아름다움을 결코 놓치지 않는다. 바로 파리 오페라 극장의 존재 근거이기도 하다. ●
 
글 안호상 홍익대 공연예술대학원장·전 국립중앙극장장  사진 더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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