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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찔린 김정은, 새 대미전략 찾기 고민에 빠졌다

중앙선데이 2018.05.26 01:57 585호 3면 지면보기
[SPECIAL REPORT] 6·12 북미 정상회담 취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5일 밀집모자를 쓰고 새로 완공된 강원도 지역의 고암~답촌 철로를 시찰하고 있다. [조선중앙TV=뉴시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5일 밀집모자를 쓰고 새로 완공된 강원도 지역의 고암~답촌 철로를 시찰하고 있다. [조선중앙TV=뉴시스]

북한 외교라인의 대미(對美) ‘으름장’이 먹히지 않았다. 회담판을 깰 것처럼 위협하고 입맛에 맞지 않는 상대를 찍어내던 전술이 북·미 정상회담 취소란 ‘참사’를 부른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4일(현지시간) 전격적인 회담 취소 선언을 한 건 북한의 도를 넘는 담화공세가 직접적 원인이 됐다는 분석이다. 여기에 남북관계에서 고위급 회담 거부 등 평양 당국의 ‘몽니’, 중국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의기투합을 둘러싼 ‘변심’ 논란 등이 복합적으로 파장을 미쳐 파국을 맞았다는 진단이 나온다.
 

수위 낮춘 담화 내놓은 북한
‘수뇌상봉 준비 마감단계’ 표현
미국 비난 대신 무산에 아쉬움

최선희의 대미 으름장에 대해선
“미국 언행이 불러온 반발” 해명
“만나면 관계가 좋아져” 구애도

북한의 대미 비난 담화는 북·미 정상회담 장소로 싱가포르가 낙점되고, 실무준비가 한창 탄력을 받던 상황에서 나왔다. 포문을 연 건 베테랑 미국통인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이다. 그는 지난 16일 개인 명의 담화에서 “조·미 수뇌회담(북·미 정상회담)을 앞둔 지금 미국에서 대화 상대방을 심히 자극하는 망발들이 마구 튀어나오고 있는 건 극히 온당치 못한 처사”라고 주장했다. 당시 워싱턴에서는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등을 중심으로 북한 비핵화와 관련한 여러 구상이 쏟아졌다. 특히 리비아식 핵 포기 방식이 거론되면서 북 핵을 미국 테네시주 핵폐기소인 오크리지에 이관하자는 구체적인 방안까지 제기됐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북한이 이런 불편한 국면에 유감을 밝히고 자신들의 입장을 제기하는 건 북·미 대화를 앞둔 상황이란 점을 감안해도 크게 무리라고 보긴 어렵다. 하지만 김 제1부상의 담화 수위가 지나치게 높았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을 겨냥해 “역대 대통령들보다 더 무참하게 실패한 대통령으로 남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다가오는 조·미 수뇌회담에 응하겠는가를 재고려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백악관과 미 행정부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지만, 표면적으로 사태를 악화시키는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정상회담 물밑 논의에 착수한 즈음부터 북한 노동신문이 대미 비난 수위를 낮추고 우회적 표현을 쓰는 등 전향적 태도를 보였다는 점이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한국 정부 당국자도 “김계관의 담화는 북한의 공식 입장이라 보기 어렵다”는 선에서 넘기려 했다. 이때만 해도 날짜까지 잡힌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의 역사적인 만남에 결정적 차질이 빚어질 것이라 보는 시각은 없었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두 차례 평양을 방문해 김정은 위원장과 만났고, 매우 만족해하는 평양 측 분위기가 흘러나왔다는 측면에서다.
 
문제는 24일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으로 나온 최선희 외무성 부상의 후속 담화였다. 최선희는 볼턴 보좌관과 함께 마크 펜스 부통령까지 비난하며 “미국이 지금까지 체험해 보지 못했고 상상도 하지 못한 끔찍한 비극을 맛보게 할 수 있다”고 위협했다. 지난해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발사를 감행하며 ‘워싱턴 핵 타격’을 위협하던 시점으로 돌아간 듯한 발언이었다. 최 부상은 더욱이 “저들이 먼저 대화를 청탁하고도 마치 우리가 마주 앉자고 청한 듯이 여론을 오도하고 있다”며 사실과 동떨어진 주장도 했다. 지난 3월 방북한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김정은의 정상회담 요청을 트럼프 대통령에게 전달해 회담이 성사된 과정을 인지하고 있는 미국 조야와 국제사회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얘기였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최선희의 담화가 나온 건 24일(한국시간) 오전 8시40분쯤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한·미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여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북·미 회담을 하지 않을 것”이란 말을 듣고 서울로 귀환한 시점이다. 정의용 실장이 “북·미 정상회담은 99.9% 열릴 것”이라며 장담했지만 우리 정부 안팎에선 불안한 기류에 걱정이 나왔다.
 
결국 최 부상의 담화 발표 14시간 뒤 백악관은 트럼프 대통령의 회담 취소 서한을 공개했다. 여기엔 담화를 염두에 둔 듯 “당신들의 발언에 나타난 극도의 분노와 공개적 적대감”이란 이유를 맨 먼저 꼽았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북한의 벼랑 끝 전술이 그동안 미국에 쭉 통했다”며 “이번에도 트럼프에게 통할 수 있을 것이라 착각한 듯하다”고 말했다.
 
서한 공개 이후인 25일 김계관 제1부상이 내놓은 담화는 그러나 9일 전과 달리 비난이나 위협은 없었다. 대신 ‘수뇌상봉 준비사업이 마감단계’라거나 ‘기정사실화됐던 수뇌상봉’이란 표현으로 무산에 아쉬움을 드러냈다. 최선희 부상의 대미 비난에 대해서도 “미국 측의 지나친 언행이 불러온 반발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명했다. “만나면 관계가 좋아지면 좋아졌지 더 나빠지기야 하겠냐”라며 노골적인 구애의 모습도 보였다. 문성묵 한국국가전략연구원 통일전략센터장은 “담화의 끝 대목에서 ‘첫술에 배부르겠냐’라며 대화 용의를 여러 차례 강조한 대목에서 북한이 회담 무산에 얼마나 당혹해하고 수습에 골몰하는지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정은이 지난 5개월간 공들인 북·미 정상회담은 일단 판이 깨졌다. 다시 일정을 잡으려면 쉽지 않은 여정을 겪을 공산이 크다. 평양 권력 내부에 상당한 충격파가 전해졌을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트럼프 서한에 대해 김정은이 직접 답하지 않고 김계관이 “위임에 따라” 담화를 낸 것도 이를 엿보게 한다. 풍계리 핵 실험장 폐기행사를 막 끝내고 국제사회에 흥행을 시작하려던 찰나 ‘북·미 정상회담 무산’ 카드를 꺼내 든 트럼프에 김정은과 북한 외교라인이 허를 찔렸다는 분석도 있다.
 
김정은으로서는 구겨진 스타일을 챙겨 가면서 새로운 대미전략을 짜야 하는고민스러운 상황에 빠졌다. 마음 같아선 어설픈 ‘담화 공세’로 딜레마를 자초한 대미 라인을 책망하고 싶겠지만 그럴 수도 없는 형국이다. 2년 전 강석주 외교담당 부총리가 숨지면서 그나마 미국 관련 일을 해낼 수 있는 건 김계관 제1부상과 최선희 부상이란 점에서다. 스위스 유학 당시 현지 대사이자 후견인이던 이수용 외교담당 부위원장이 측근으로 포진해 있지만 그는 유럽연합(EU)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yj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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