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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거슬리던 층간소음이 문득 자장가로 들린 까닭은

중앙일보 2018.05.24 07:00 종합 18면 지면보기
[더,오래] 윤경재의 나도 시인(9)
길가에 핀 채송화. [중앙포토]

길가에 핀 채송화. [중앙포토]



천진난만
 
숱한 불면을 이기고
꽃잠 들게
산소처럼 맑은 얼굴을 내민 건
누구인가
뿌듯이란 꽃등을 켜고
키 작은 줄기 끝에
마음뿐만이 아니라
곁까지
사랑으로 내어주는
노랑 분홍 자주 흰빛
물기 어린 채송화
 
[해설] 살기 좋고 나쁨은 마음먹기 나름
어느 한적한 마을에 지혜가 넘치는 노인이 살았다. 그는 주유소 한쪽에 흔들의자를 가져다 두고 지나가는 운전사와 이야기를 나누며 지냈다. 손녀도 자주 할아버지 발치에 앉아 오가는 사람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정오 무렵 키가 훤칠한 여행객이 나타났다. 노인은 단번에 그가 지나가는 사람인 줄 알았다. 그는 이 마을이 살기에 어떤지 확인하려는 듯 이리저리 돌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노인에게 다가와 “이 마을은 어떤 곳입니까?”라고 물었다. 노인은 대답 대신 그 사람을 바라보며 천천히 되물었다. “당신은 어떤 마을에서 오셨습니까?”
 
어느 한적한 마을에 정오 무렵 키가 훤칠한 여행객이 나타나 이 마을은 어떤 곳이냐고 물었다. [사진 Picjumbo]

어느 한적한 마을에 정오 무렵 키가 훤칠한 여행객이 나타나 이 마을은 어떤 곳이냐고 물었다. [사진 Picjumbo]

 
여행객은 “제가 사는 마을 사람은 모두 비판적입니다. 서로 나쁜 소문을 퍼뜨려 살기 정말 좋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저는 그곳을 떠나고 싶어요. 그리 유쾌한 곳이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다. 의자에 앉아 있던 노인은 낯선 그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요. 이 마을도 똑같답니다.”
 
한 시간가량 지난 뒤 그곳을 지나던 한 가족이 주유소에 들렀다. 자동차가 서서히 방향을 틀어 들어오더니 노인과 손녀가 앉은 의자 바로 앞에 와서 섰다. 어머니가 두 아이를 데리고 내리더니 화장실이 어딘지 물었다. 의자에 앉아 있던 노인은 작고 흰 화장실 표지판을 가리켰다.
 
운전석에서 내린 남자는 노인에게 공손한 말투로 “이 마을은 살기 좋은 곳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노인은 좀 전과 마찬가지로 그 사람에게 되물었다. “당신이 사는 마을은요? 그곳은 어떤 곳입니까?”
 
남자는 노인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제가 사는 마을 사람들은 모두 가깝게 지냅니다. 이웃에게 언제나 기꺼이 도움을 주려 하죠. 어딜 가나 사람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고 고맙다고 말합니다. 저는 우리 마을을 떠나고 싶지 않아요. 꼭 가족을 떠나는 것 같은 서운한 느낌이 듭니다.”
 
노인은 그에게 따뜻한 미소를 보냈다. “이 마을과 아주 비슷하군요.” 그 가족은 고맙다고 인사한 뒤 손을 흔들며 떠나갔다. 그들이 멀어지자 손녀는 할아버지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할아버지. 첫 번째 사람이 왔을 때는 우리 마을이 살기에 아주 고약한 곳이라고 하시더니 왜 저 가족에게는 아주 살기 좋은 곳이라고 하셨어요?”
 
할아버지는 의아해하는 손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사람은 어디를 가나 자기 마음을 가지고 다니는 법이란다. 그리고 그 마음이 살기 좋은 곳을 만들기도 하고 고약한 곳을 만들기도 한단다.”
 
조용하던 윗층서 어느날 시끄런 소음이
조용하던 윗집에 새로 이사온 가족은 한밤중에도 식탁 의자 끄는 소리나 어린아이가 뛰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중앙포토]

조용하던 윗집에 새로 이사온 가족은 한밤중에도 식탁 의자 끄는 소리나 어린아이가 뛰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중앙포토]

 
조용하던 윗집에 누군가가 새로 이사 와 한밤중에도 소음이 들렸다. 식탁 의자를 끄는 소리며 어린아이가 뛰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일찍 잠드는 내게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한 번쯤 주의를 주고픈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사정이 어떻게 흘러갈지 몰라서 참고 있었다. 집사람이 우리도 사내아이를 둘이나 키웠으니 아무 할 말이 없다고 만류한다.
 
그러다 승강기에서 윗집 아이들과 만났다. 어찌나 예쁘던지 안아주고픈 생각이 들었다. 위로 딸만 셋에다 막내가 사내란다. 큰 애가 이번에 고등학교에 들어갔고, 중학교, 초등학교 다니는 두 딸과 늦둥이 막내란다. 엄마 치마꼬리를 잡고 얼굴을 들어올리는 모습이 꼭 7월의 채송화를 닮았다. 그늘이라고는 한 줌도 없는 말간 모습이 놀라울 지경이다. 나도 저런 아이를 기른 적이 있겠지.
 
아이 엄마 인상도 서글서글하니 말귀가 통할 듯싶다. 아래층에서 탄 나를 뭐라 소개할까 망설이다가 고등학교 다닌다는 큰 애에게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눈가의 미소는 막내에게 두고 대화는 큰딸과 하는 유체이탈 화법을 구사했다. “어제 너희가 몇 시에 잤는지 난 안다. 한 시에 잤지?” “…”
 
잠시 승강기 안에 정적이 흘렀다. 순간 얼마나 미안하던지. 애들 엄마는 그래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요즘 네 아이를 키운다는 게 얼마나 힘겨울지 상상이 가는데, 씩씩하게 키우는 것만으로도 대견하다. 따로 응원과 위로는 못 할망정 쓴소리를 했으니 부끄럽다. 아이 엄마는 내게 미안했던지 아기에게 이렇게 말했다. “막내야, 할아버지께 배꼽 인사드려야지.”
 
채송화는 밤에 산소 내뿜어
벼랑 끝 바위틈에 핀 바위채송화. [중앙포토]

벼랑 끝 바위틈에 핀 바위채송화. [중앙포토]

 
그날 난 위층 아기를 채송화라 부르기로 했다. 그날 밤부터 아이 뛰는 소리가 나면 난 말간 채송화를 떠올렸다. 다육식물처럼 손과 다리가 통통하고 물기 먹은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나는 아이 모습을 떠올렸다. 몸체에 물기를 저장하고 있는 다육식물은 다른 화초와 달리 밤에 오히려 깨끗한 산소를 내뿜는다. 실내 공기정화에도 탁월하단다. 그래서 침대맡에 두면 숙면에 도움이 된다. 삭막하고 건조한 세상을 윤기 나게 한다.
 
승강기에서 윗집 가족을 만나고 난 뒤 나는 예전처럼 일찍 잠들 수 있었다. 층간소음이 소음으로 들리지 않았다. 그들의 속사정을 이해하게 된 덕분이다.
 

윤경재 한의원 원장 whatayu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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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재 윤경재 윤경재 한의원 원장 필진

[윤경재의 나도 시인] 시를 시인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시쓰기를 어려워들 합니다. 그러나 시인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작품이든 아니든 시를 쓰면 모두 시인입니다. 누구나 그저 그런 일상을 살다가 문득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오래 기억에 남는 특별한 체험이라면 감정을 입혀 쓰는 것이 바로 시입니다. 시인으로 등단한 한의사가 연재하는 시를 보며 시인이 되는 길을 가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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