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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대통령 36분간 앉혀놓고…트럼프 '외교결례' 원맨쇼

중앙일보 2018.05.24 01:08 종합 3면 지면보기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2일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에 앞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이날 질의응답은 예정된 시간보다 길어져 36분 동안 계속됐다. [AFP=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2일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에 앞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이날 질의응답은 예정된 시간보다 길어져 36분 동안 계속됐다. [AF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지난 22일(현지시간) “6월 12일 회담이 열리지 않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며 처음으로 북·미 정상회담 조건부 취소·연기론을 꺼냈다. 문재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 앞서 36분간 기자들의 질문을 받는 자리에서다. 김계관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이 “일방적 핵 포기를 강요하면 수뇌회담을 재고할 수밖에 없다”고 반발한 지 6일 만이다. 이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이 꺼낸 취소·연기론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완전한 비핵화(CVID)에 합의할지, 아니면 회담을 무산시킬지 직접 선택하라는 공개 경고라는 분석이 나온다.
 

“여건 안되면 북·미 회담 취소·연기”
CVID냐 아니냐 택하라는 공개 경고

“문, 지금 얘기 안 들으니 통역 필요
중국 이웃인데 북·중 밀월 의견있나”
"전화로 얘기 많이해 물어볼 거 없다"
단독 회담 시간 줄이며 외교 결례

워싱턴포스트(WP)는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에게 회담하고 싶으면 6월 12일까지 합의하라고 보다 강한 입장을 취할 수도 있었지만 완전 무산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여지를 열어놓은 것”이라고 분석했다.
 
WP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의 회담 취소·연기 언급은 2주 전 북한 대표단이 싱가포르 북·미 실무회담에 나타나지 않은 뒤 이번 주 다시 조셉 해진 백악관 부실장과 미라 리카델 국가안보회의(NSC) 부보좌관이 북측과 실무 접촉을 하기로 한 상황에서 나왔다. 김 위원장은 지난 9일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과 두 번째 만남에서 ‘빠르고 포괄적인’ 비핵화에 대한 협의보다는 9600㎞ 왕복 항공편의 유류 문제나 싱가포르 현지 경호 등 실무적인 문제에 더 관심을 보였다는 것이다. 이런 정황을 감안하면 트럼프는 이날 김정은에게 ‘비핵화 의지를 갖고 협상에 보다 적극적으로 임하라’는 메시지를 보낸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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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대통령은 동시에 회담 성사에 대한 열망도 드러냈다. 그는 “김 위원장이 북한을 위대하게 만들 기회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한국과 중국·일본은 엄청난 금액의 돈을 투자해 북한을 위대하게 만드는 걸 기꺼이 돕기로 약속했다”고 한·중·일 3국의 대규모 원조 카드까지 꺼냈다.
 
일각에선 트럼프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입장에서 점차 물러서고 있다는 해석도 제기하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트럼프 대통령이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 식으로 북한의 모든 핵 프로그램을 포장해 한꺼번에 미군 수송기로 실어 내오는 형태의 즉각적인 비핵화에선 물러섰다”며 “단계적 핵 폐기 가능성에 대해 문을 열었다”고 분석했다.
 
빅터 차 조지타운대 교수는 “북한이 갑자기 새로운 존재로 바뀌어 핵무기를 자유세계 편입과 교환함으로써 자신이 쉽게 승리할 것이란 생각은 이제 대통령의 마음에서 사라지고 있다”며 “북한과 관련해 동화 같은 결말은 없다”고 말했다.
 
한편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기자들의 질문을 받으며 ‘원맨쇼’를 펼쳤다. 두 정상이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하기 위해 준비된 단독회담은 미뤄졌고, 진행 시간도 애초 30분에서 21분으로 단축됐다. 누가 봐도 외교적 결례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문 대통령과 전화로 많은 얘기를 나눠 더 물어볼게 없다. 회담은 길지 않을 것"이라며 모두 28차례 질문을 받으며 회견을 진행했다. 이중 문 대통령에게 주어진 답변 기회는 단 두 차례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답변을 권한 중국의 개입 문제와 한국 기자단의 마지막 질문이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은 문 대통령을 옆에 둔 채 국내 정치 문제에 대해 장황한 답변을 늘어놨다. 미 연방수사국(FBI)의 트럼프 캠프 비밀 정보원 문제 등에 대해서다. 그러다 중재자 역할을 하는 문 대통령을 신뢰하느냐는 질문이 나오자 “굉장히 신뢰하고 있다”고 치켜세우는 듯하더니 갑자기 “그가(문 대통령이) 들을 수 있도록 통역을 하겠느냐. 왜냐하면 지금 그는 우리가 (영어로)하는 이야기들을 듣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통역될 때까지 기다리자”고도 했다.
 
당황스러운 장면은 또 나왔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세계 수준 포커 플레이어"라며 2차 북·중 정상회담 뒤 북한이 태도를 바꿨다며 중국을 비판하다가 갑자기 “문 대통령은 어떻게 생각하나. 이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더니 “나는 문 대통령을 곤경에 빠뜨리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중국과 멀지 않은 바로 이웃에 살지 않느냐"고 농담을 했다. 중국의 눈치를 보느라 의견 개진이 힘들지 않겠느냐는 뜻으로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문 대통령은 중국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은채 "트럼프 대통령이 세계사적 대전환의 위업을 이룰 것이라고 확신한다"는 취지의 ‘동문서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36분 회견 마지막, 한국 풀기자단이 문 대통령에게 "북 태도 변화에 대한 우려가 나오는 상황에서 한국의 중재자 역할을 어떻게 할지"를 물었다. 문 대통령이 "저는 북·미 정상회담이 예정대로 제대로 열릴 것이라고 확신한다. 제 역할은 미국과 북한 사이의 중재를 하는 입장이라기 보다 북·미 정상회담의 성공을 위해 미국과 함께 긴밀하게 공조하고 협력하는 관계"라며 한국어로 답변했다. 그러자 트럼프 대통령은 웃으면서 "나는 통역을 들을 필요가 없다. 예전에 들었던 얘기일거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라며 통역을 막곤 회견을 일방적으로 끝냈다. 
 
워싱턴=정효식 특파원 jjpo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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