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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간 매일 10시간, 3126자에 담은 부모님 은혜

중앙일보 2018.05.24 00:10 종합 23면 지면보기
지난 18일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대작 ‘부모은중경’ 전시작을 배경으로 인사하는 하석 박원규씨. 하석은 ’ 붓을 든 지 55년, 돌아보니 어머니의 큰 사랑으로 그 힘겨운 세월을 이겨왔다“고 말했다.

지난 18일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대작 ‘부모은중경’ 전시작을 배경으로 인사하는 하석 박원규씨. 하석은 ’ 붓을 든 지 55년, 돌아보니 어머니의 큰 사랑으로 그 힘겨운 세월을 이겨왔다“고 말했다.

붓글씨의 바다, 서해(書海)다. 먹의 구름, 묵운(墨雲)이다.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실험실 높디높은 공간을 높이 3.3m, 너비 1.5m 대작 81점이 꽉 채웠다. 글자 한 자가 32X28㎝이니 큼직한 공책 크기다. 이런 대형 글씨 3126자가 하늘로부터 쏟아지듯 내걸리니 전시장을 거니는 관람객은 먹 향기에 취한다. 지난 18일 개막한 ‘하석, 부모은중경’전(28일까지)은 한국 서예계가 오래 기다려온 걸작에 대한 갈증을 파도처럼, 소나기처럼 씻어냈다.
 

하석 박원규 ‘부모은중경’ 전시회
“작고한 어머니 큰 사랑 느끼며 작업”
중국 종이, 일본 먹, 천지 물의 만남
광개토대왕비 서체로 일필휘지

6년여에 걸친 대장정을 끝낸 하석(何石) 박원규(71)씨는 “10여 년 전 세상을 떠나신 어머니의 크신 사랑, 당신의 숨결을 느끼며 작업했다”고 말했다. 통일신라시대로부터 전해져온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은 한량없이 크고 깊은 부모님 은혜에 보답하도록 가르친 불교 경전이다.
하석 박원규 선생

하석 박원규 선생

 
“2012년 봄에 류성우 석주박물관장이 우리 시대를 깨우쳐줄 작품을 제안했어요. 효(孝) 정신이 흐려지고 가족관계가 붕괴하는 오늘을 돌아보자며 ‘부모은중경’을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 서체로 써서 후대에 남기자고 했지요.”
 
하석은 서예계에서 통 큰 기인으로 통한다. 학인(學人)의 기초 위에 예인(藝人)의 경지를 이뤘고 지사(志士)의 풍모를 풍긴다. 그런 품성을 아는 류 관장이 어려운 과제를 안겨준 셈이다. 이 대형 프로젝트는 여러 사람의 힘과 한·중·일 삼국의 재료가 더해진 합작품이 됐다. 벼루와 붓은 한국산이지만 특대품 종이는 3년에 걸쳐 중국에서 구했고, 먹은 1년에 100개만 만든다는 일본의 명인에게 부탁해 입수했다. 2016년 6월에는 하석의 요청으로 백두산 천지 물을 공수해 왔다. 하석의 제자들이 돌아가며 매일 먹을 갈고 옆에서 거들었다.
 
“광개토대왕비 글씨체를 쓰는 것은 모험이지만 그 웅혼한 기상을 오늘에 되살리는 건 도전할 만한 과제였지요. 그 서체가 아니고서는 ‘부모은중경’의 한없이 깊고 넓은 미감과 이야기를 도저히 써낼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음을 다잡으려 천지 물을 길어다 달라 했지요. 부모와 자식 간 험악한 일이 다반사가 된 현대 사회에 ‘부모은중경’의 깊은 뜻을 글씨로 널리 알리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작업은 2016년 7월 6일부터 21일까지 16일 동안 하루 10시간씩 꼬박 서서 일필휘지로 이어졌다. 전시기획을 맡은 이동국 서예박물관 수석큐레이터는 “하석의 팔뚝에 내장된 모든 서체를 쏟아부어 곰삭을 대로 삭아 한없이 부드러우면서도 뼈가 박힌 필획이 탄생했다”고 평했다.
 
하석은 서울 백악미술관에서 23일까지 이어진 제5회 일중(一中) 서예상 대상 수상자 초대전에서도 조형미와 해학성이 뚜렷한 실험작을 내놓아 쉼 없이 연구하는 서도(書道)의 길을 보여줬다. 26일 오후 전시장에서 열리는 작가와의 대화에서 속내를 들을 수 있다. 
 
글·사진=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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