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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65세 정년시대…교통사고 손해배상도 65세 기준”

중앙일보 2018.05.22 09:00
공사장에서 일하고 있는 인부. [사진 외부이미지]

공사장에서 일하고 있는 인부. [사진 외부이미지]

 

"법원이 30년 가까이 유지해 온 '육체노동은 60세까지만 할 수 있다'는 경험칙은 더 이상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 경비원 상당수가 60세 이상이고, 공사현장에서도 60대 이상의 인부를 흔히 볼 수 있다."

 
교통사고를 당한 후 노동능력이 떨어졌다면 그로 인해 덜 벌게 된 '평생의 수입'을 배상받을 수 있는데, 이 '평생'의 기준을 올려야 한다는 법원 판결들이 이어지고 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항소7부(부장 김은성)는 지난 8일 육체노동자가 일할 수 있는 최대나이를 65세로 봐야 한다면서, 60세까지밖에 일을 못 한다는 전제에서 손해배상액을 산정한 1심 판단은 잘못됐다고 판결했다. 
 
이번 판결에 따르면 8년 전 자동차사고로 장해를 입은 한모(38·사고당시 29세)씨는 가해 버스 측으로부터 3억 8860만원을 받게 된다. 사고로 인해 줄어든 노동능력을 사고일로부터 5년간 31.57%, 이후 65세가 될 때까지 15%로 보고 '잃어버린 수입'을 계산한 뒤, 여기에 기존 치료비와 위자료 등을 합한 것이다. 1심에서는 기준을 60세로 잡았기 때문에 배상받을 수 있던 금액이 284만원 더 적었다.
 
은퇴 시기가 늦어지면서 실제 일할 수 있는 연령의 상한선을 올려야 한다는 판결이 잇따르고 있다. [중앙포토]

은퇴 시기가 늦어지면서 실제 일할 수 있는 연령의 상한선을 올려야 한다는 판결이 잇따르고 있다. [중앙포토]

'육체노동자=60세까지'는 법원에서 1991년 이후 지금까지 통용돼오고 있는 일종의 규칙이다. 이 해에 대법원이 "일용노동에 종사하는 사람은 만 60세에 이르기까지 일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판결을 내렸고 이 판례가 기준이 됐기 때문이다. 
 
이번 재판부의 판단은 이 판례를 따르지 않았다. 재판부는 육체노동자의 가동연한(稼動年限·일을 해 돈을 벌 수 있는 최후 연령)을 왜 60세가 아닌 65세로 올려야 하는지에 대해 총 22페이지의 판결문 중 12페이지를 할애했다.
 
재판부는 ▷평균수명이 늘어났으며 앞으로도 늘어날 것이고 ▷기능직공무원·민간기업의 정년이 60세로 늘어났고 ▷연금 수급연령도 65세로 변경됐으며 ▷실질 은퇴연령은 이보다 높은 72세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고 봤다. 

 
재판부는 연금을 받기 시작하는 나이를 중요한 신호로 봤다. 판결문에 "기초연금의 수급연령을 65세로 정한 것은 그 나이 이전까지는 본인의 노동력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현재 경제상황을 충분히 고려한 정책적 판단"이라면서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65세까지 돈 벌 능력이 있다고 해 기초연금 지급대상에서 배제했는데, 사고가 났을 때는 60세까지만 일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모순된다"고 썼다. 
 
재판부는 또 "연금의 수령시기가 도래할 때 비로소 스스로를 부양할 책임에서 벗어나는 것"이라며 다음과 같은 근거를 들었다. "은퇴 후 자식으로부터 부양받던 시기는 이미 지나갔다. 혼자서 벌면 부족해 맞벌이가 일상화되고 이직도 빈번해졌으며, 운 좋게 첫 직장을 오래 다니고 퇴직하더라도 대부분의 퇴직자들이 자식에 의한 부양을 받지 못한다. 이미 노년층 부양은 연금제도에 의해 이뤄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재판부는 연금 수급 연령이 65세인 점을 감안해 노동자의 가동연한도 65세로 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연합뉴스]

재판부는 연금 수급 연령이 65세인 점을 감안해 노동자의 가동연한도 65세로 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연합뉴스]

 
재판부는 "은퇴란 먹고 살기 위한 경제활동을 완전히 그만두는 나이"라면서 "OECD회원 국 중 실질 평균 은퇴연령이 70세 이상인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전세계적으로 가장 늦은 나이까지 일한다. 우리나라는 은퇴 후 재취업해 일하는 사람이 다른 국가에 비해 상당히 많다. 정년을 다 채우고 퇴직하더라도 최소 10년 이상 노동시장에서 일하는 것이다"고 했다.
 
재판부는 "과거 법원이 취해왔던 '육체노동자의 60세 가동연한' 입장을 그대로 고수한다면, 경비원 등 감시단속 업무 종사자의 상당수가 60세 이상이고, 공사현장에서도 60대 이상의 인부를 흔히 볼 수 있는 현실과 상당한 괴리를 설명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대법원 대법정 전경. 이번 판결이 대법원에 올라가 확정될 경우 육체노동자의 가동연한 기준이 달라진다.[중앙포토]

대법원 대법정 전경. 이번 판결이 대법원에 올라가 확정될 경우 육체노동자의 가동연한 기준이 달라진다.[중앙포토]

 
우리 대법원은 70년에 딱 한 번, 65세를 기준으로 본 적이 있었다. 미국인이 피해자였던 사건이다. 미국연방법에는 '65세 이하의 근로자를 고용조건에서 나이를 이유로 차별할 수 없다'는 내용이 있고, 당시 미국에서는 일반적으로 65세가 되면 직장에서 은퇴하고 있다는 점이 고려됐기 때문이었다. 이번 재판부는 당시 판례를 언급하면서 "현재 우리나라의 사회적·경제적 구조와 생활여건 등 사정이 1970년 무렵 미국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볼 이유가 없다"고 했다.
 
하급심 중 육체노동자의 가동연한을 65세로 본 판결들은 최근 종종 있었지만, 대개 곧 60세가 되거나 60세를 조금 넘긴 이들에게 예외적으로 몇 년 더 인정해주는 식이었다. 이미 그 나이에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60세부터는 일할 능력이 없다'고 하긴 어렵기 때문이다. 2016년 12월, 수원지방법원은 60세에 교통사고를 당한 김모씨가 가해차량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60세가 아닌 65세까지 일할 수 있다고 보고 김씨가 잃어버린 수입을 계산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사고 당시 김씨는 가사도우미로 일하고 있었다. 
 
이번 판결처럼 20대의 젊은 나이에 사고를 당한 피해자에게 60세가 아닌 65세를 가동연한으로 인정한 것은 처음이다. 판결문에는 이제 65세 기준을 몇몇 고령 피해자들에게 인정해주는 예외가 아닌, 새로운 규칙으로 가져와야 한다는 주장이 담겼다.
 
상고기간인 이달 말까지 원고(사고당한 한씨)나 피고(가해 버스 측) 중 어느 한쪽에서라도 상고를 한다면 이 판결은 대법원으로 간다. 대법원에서도 이 판결이 확정되면, 30년 동안 우리 법원이 가져왔던 '육체노동자=60세까지'라는 기존 판례는 깨지고 '육체노동자=65세까지'라는 새로운 판례가 생기게 된다.
 
◆ 우리 법원이 인정해온 '가동연한'은
35세: 다방 종업원(대법원 1991년 판결), 골프장 캐디(서울고법 2002년 판결)
40세: 프로야구 투수(대법원 1991년 판결) 
50세: 속칭 술집 마담(대법원 1979년 전원합의체 판결) 
57세: 공무원에 준하는 처우를 받아온 민간보육시설 보육교사 (대법원 2001년 판결)
60세: 활어 구매 및 운송업자 (대법원 1993년 판결), 식품소매업자(대법원 1993년 판결), 보험모집인(대법운 1994년 판결), 가스도소매업자 (서울고법 2004년 판결), 다단계 판매회사 판매원(부산고법 2004년 판결)

65세: 소설가(대법원 1993년 판결) 의사(대법원 1998년 판결) 가사도우미(수원지법 2016년 판결)
70세: 변호사(대법원 1993년 판결) 목사(대법원 1997년 판결) 승려(서울고법 2007년 판결) 가수(서울중앙지법 2017년 판결·가수 신해철씨 사례)

73세: 택시기사(서울중앙지법 2017년 판결)
 
 
문현경 기자 moon.h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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