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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7살 창현이…"5ㆍ18 행불자 찾기, 진상규명 초석"

중앙일보 2018.05.17 13:33
1980년 5월 계엄군에 의해 숨진 광주시민들의 시신. [중앙포토]

1980년 5월 계엄군에 의해 숨진 광주시민들의 시신. [중앙포토]

38년이 흘렀지만 아버지는 아직 아들을 잊지 못하고 있다. ‘젊은 시절 조금 더 노력했다면…’하는 괜한 죄책감 속에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초등학교에 다니던 아이는 5월 18일 집을 나섰다. 휴교령이 내려진 때였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어머니가 아들을 찾아 나섰지만, 소용이 없었다.
 
건축업을 하던 아버지는 전남 완도에서 급히 광주에 올라왔다. 전국을 돌며 병원, 야산 등 곳곳을 헤맸지만, 아들을 찾지 못했다. 5월 20일 광주역 쪽으로 가는 모습만 봤다는 마지막 목격담만 들을 수 있었다. 90년대 초에야 총에 맞아 숨진 아들을 사진으로 확인하고 사망원인이 ‘M16 총상’이라는 사실을 전해 들었을 뿐 유해는 찾지 못했다. 제38주년 5ㆍ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소개될 행방불명자(행불자) 이창현(당시 7세) 군과 아버지 이귀복(81)씨의 사연이다.
 
5ㆍ18로 행방불명이 됐다며 가족에 의해 신고된 사람은 242명이다. 이 가운데 82명이 심사를 거쳐 5ㆍ18 행불자로 ‘공식’ 인정됐다. 2002년 6명의 유해는 확인됐다. 광주광역시 북구 망월동 옛 묘역에 묻힌 무명열사 유해에 대하 유전자 분석을 통해서다. 나머지 76명의 주검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1980년 5월 당시 계엄군에 의해 구타를 당하는 광주시민. [중앙포토]

1980년 5월 당시 계엄군에 의해 구타를 당하는 광주시민. [중앙포토]

 
이들을 찾기 위한 노력은 97년에야 시작됐다. 광주시가 행불자를 찾기 위한 위원회를 꾸린 시점이다. 암매장 추정지 발굴 작업은 총 3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2002년부터 2009년까지다. 광주 화정동 국군통합병원 담장 아래 등 모두 9곳에서 이뤄진 발굴 작업의 성과는 없었다.  
 
중단됐던 발굴 작업은 8년 만인 지난해 재개됐다. 5ㆍ18민주화운동이 발생한 지 37년이 흐른 뒤다. 5ㆍ18기념재단을 중심으로 5월 3단체(유족회ㆍ부상자회ㆍ구속부상자회)가 주축이 됐다. 광주에 투입됐던 전 공수부대원의 진술 등 매우 구체적인 목격담까지 나오면서 성과가 기대됐다.
 
여러 목격담을 토대로 80년 당시 계엄군이 주둔했던 옛 광주교도소 부지, 화순 너릿재 등지에서 발굴 작업이 올해 초까지 이뤄졌지만 역시 행불자 유해는 찾을 수 없었다. 발굴 작업은 오는 9월에 꾸려질 ‘5ㆍ18진상규명 조사위원회’를 통해 재개될 예정이다. 현재 5·18 기념재단은 발굴 작업 재개 때 조사위에 제공할 자료를 확보하고 있다.
 
제37주년 5ㆍ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해 눈물을 흘리는 유족들. [사진 청와대사진기자단]

제37주년 5ㆍ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해 눈물을 흘리는 유족들. [사진 청와대사진기자단]

주요 암매장 추정지에서 행불자의 유해가 발견되지 않은 배경을 두고 증거 인멸을 위한 사후 처리 가능성이 나온다. 80년 투입됐던 7공수부대가 다른 부대와 달리 6월 중순 무렵까지 광주에 남아 어떤 임무를 수행했는지 정확히 확인되지 않아서다. 11공수부대의 경우 철수했다가 사복 등 차림으로 광주에 돌아왔다는 증언도 있다.  
 
5ㆍ18기념재단 조진태 상임이사는 “국방부 5ㆍ18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보면 (5ㆍ18 관련) 기록물의 왜곡과 조작이 조직적으로 이뤄져 있다”며 “암매장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말했다. 조 상임이사는 “행불자들을 찾는 것은 5ㆍ18 진상규명과 실체를 밝히는 데 초석이 되는 아주 중요한 일”이라며 “당시 계엄군들의양심고백이 필요하다”고 했다.
 
광주광역시=김호 기자 kim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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