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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태영호의 증언

중앙일보 2018.05.17 00:01 종합 31면 지면보기
고정애 중앙SUNDAY 정치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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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로서 속수무책일 때가 있는데 런던 특파원 시절인 2015년 김정철 취재가 그런 경우였다. 김정은의 형인 그가 런던에서 에릭 클랩턴 공연을 봤다는 외신보도 후 그가 묵던 호텔로 달려갔다. 그림자도 볼 수 없었다. 모스크바행 비행기를 탄다는 말에 히스로 공항에서 눈에 불을 켰으나 별무소득이었다. 그나마 동료가 수상한 동양 남성을 촬영했다며 카메라를 내밀기에 혹시나 했다. 우리 대사관 직원이었다.

 
 
 
2014년엔 괴이한 일도 있었다. 런던의 한 이발소가 행사 포스터의 배경으로 김정은 사진을 썼다가 북한 대사관 직원 두 명으로부터 “경애하는 지도자에게 불경스럽다. 떼라”는 협박을 받았다는 것이다. 설마 했는데 진짜였다. 포스터엔 ‘배드 헤어 데이(BAD HAIR DAY?)’란 문구가 있었다. 이발소는 ‘머리 모양이 별로인 날’을 뜻한 듯한데, 결국 문구의 또 다른 의미(일진 사나운 날)대로 된 격이었다.
 
최근 그 자초지종을 알게 됐다. 15일 발간된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 공사의 『3층 서기실의 암호』 덕분이다. 이발소 행패의 주역이 태 전 공사였다. 김정철의 61시간 런던 체류를 총괄한 이도 그였다. 김정철은 그와 함께 음반 매장에 갔고 덴마크가에서 즉흥 기타 연주를 했으며 셀프리지 백화점에서 아동복 매장에 들렀다. 다들 중앙일보 런던 사무실에서 도보로 10분 내외, 바로 코앞이었다. 허탈했다.
 
어쨌거나 태 전 공사의 책을 읽는 건 독특한 경험이었다. 김정은이 형을 맡길 정도였던 엘리트 북한 외교관의 관점에서 본 북한이어서다. 그 나름의 작동 논리와 희로애락이 있었다. 인상적인 대목이 적지 않은데 특히 두 부분이 그랬다.
 
“2017년까지 핵 무력을 완성하고 2018년 초부터 조선도 핵보유국의 지위를 공고화하는 평화적 환경 조성에 들어가야 한다. 인도·파키스탄 모델을 창조적으로 적용, 핵보유국으로 남는다.” 2년 전 북한판 재외공관장 회의에서 모였다는 의견이다. 지금은 어떤가.
 
“비난도 비판도 아닌 비관이었다.” 인민군 중장이던 장인이 김정일 시대에 도청 끝에 추방된 사유라고 했다. 비관마저도 금지된 사회, 아득했다. “삼수갑산에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다 들을 수 있게 하라”는 김정은 시대는 어느 정도인가.
 
사실 독특한 게 또 있다. 책을 소비하는 심리다. 북한의 비난은 예상 가능했다. 하지만 인터넷 서점에 달리는 리뷰는 뜻밖이었다. “현 정부에서 사실상 금서가 될 수 있으니 빨리 사야 한다.” 우리야말로 어떤 상태인가.
 
 

고정애 중앙SUNDAY 정치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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