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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한 척, 억울한 척하며 다 챙긴다…김정은도 '저팔계 외교'?

중앙일보 2018.05.16 15:38
김정일의 ‘저팔계 외교’ 전략 차용? 김정은 밀당외교 배경은 
남북 정상회담에 이어 북ㆍ미 정상회담으로 순탄하게 이어지는듯한 국면에 제동을 건 것은 북한이었다. 김계관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은 16일 담화를 통해 “일방적인 핵포기만을 강요하려 든다면 우리는 그러한 대화에 더는 흥미를 가지지 않을 것”이라며 정상회담 재고 가능성을 내비쳤다. 이날 북한은 한ㆍ미 공군의 연합공중훈련인 ‘맥스선더’(Max Thunder) 훈련을 비난하며 16일로 예정됐던 남북고위급회담도 취소했다. 북한은 왜 이럴까. 어떤 전략을 쓰고 있는 걸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청와대사진기자단]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청와대사진기자단]

최근 출간한 태영호 전 주영국 공사의 책 『3층 서기실의 암호-태영호 증언』에는 이러한 ‘밀당외교’ 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대목이 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아버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추구했던 이른바 ‘저팔계식 실용외교’다. 태 전 공사는 책에서 “저팔계 외교는 이념에 기초한 외교로부터 탈피해 실리를 챙기는 외교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라며 “중국 소설 『서유기』에 나오는 저팔계처럼 솔직한 척, 어리석은 척, 억울한 척, 미련한 척을 하면서 어딜 가나 얻어먹을 것은 다 챙기는 외교를 해야 한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김정일은 당시 남북 유엔 동시가입, 소련 해체, 한ㆍ중 수교, 1차 북핵 위기 등을 겪으며 중ㆍ소의 취약점과 한계를 파악했다고 한다.
 
당시 보도(중앙일보 1996년 4월 18일자 2면)에 따르면 96년 2월 귀순한 현성일 전 북한외교관(잠비아주재 3등서기관)은 특별 강연에서 “김정일은 ‘저팔계식 외교’를 대미외교의 기본지침으로 강조하면서 저팔계가 막무가내로 적진을 휘젓고 다니면서 잇속을 챙기듯 미국을 상대하라고 외교관들에게 주문하고 있다”고 말했다. 97년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와 함께 망명한 김덕홍 전 노동당 부실장의 회고록(‘『나는 자유주의자’』)에는 이러한 ‘저팔계 외교’라는 대미 협상 방침을 주고 빌 클린턴 행정부를 속였다는 내용도 담겨있다.    
  
'3층 서기실의 암호' 표지 [기파랑]

'3층 서기실의 암호' 표지 [기파랑]

태 전 공사는 저팔계 외교에 대해 ▶자기 잇속만 챙길 수 있다면 이념에 상관없이 손을 잡아야 한다 ▶겉으로 북한 외교가 무엇을 추구하는지 전략과 목표를 드러내서는 안 되고, 모든 것을 불투명하게 처리해야 하며 ▶실리를 위해서라면 적대국 미ㆍ일과도 대담하게 접촉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한ㆍ미가 원하는 비핵화의 방향으로 저항 없이 잘 따라오는듯 하다가 16일 제동을 걸며 밀당을 시작한 김정은의 외교 전략은 이러한 아버지의 외교 원칙과 닮아있다. ‘솔직한 척(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공개 등)’하다가 ‘억울한 척(일방적 핵 포기 강요시 북ㆍ미 정상회담 재고려)’한 상황이 대표적이다. 앞서 한ㆍ미 연합훈련에 대해 “이해한다”며 용인할 것처럼 입장을 밝혔다가 ‘맥스선더’를 빌미로 갑작스런 고위급회담 중지 입장을 낸 것도 ‘불투명한 목표와 전략으로’ 한ㆍ미 외교당국의 판단을 흔들어 놓으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렇지만 북·미 정상회담을 지금 와서 그만두기엔 양측의 리스크가 너무 크기 때문에 회담 자체는 응할 것이라는 것이 외교가의 전망이다.(‘실리를 위해서라면 적대국과도 대담하게 접촉’)
 

박유미 기자 yumi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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