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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생활적폐란 단어가 풍기는 위압감

중앙일보 2018.05.16 01:34 종합 30면 지면보기
최지영 산업부 기자

최지영 산업부 기자

최근 쏟아진 외교안보 관련 초대형 뉴스에 묻혀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 받고 지나간 건이 있다.  
 
지난 13일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이 발표한 ‘적폐청산 평가’ 보도자료다. 청와대는 이날 과거 1년간의 성과로 국정원(댓글 등 정치 개입), 문화체육관광부(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교육부(국정교과서), 외교부(한·일) 등의 과거 적폐청산을 꼽았다. 이어 “앞으로도 중단 없는 적폐청산 및 예방에 노력하겠다”고 밝힌 후 ‘생활적폐 청산’을 주 과제 중 하나로 삼았다.  
 
청와대가 생활적폐 청산에 나서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적폐’라는 말이 ‘생활’과 묶인 것도,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직접 나서 이를 청산해야 할 주요 대상으로 꼽은 것도 낯설고 희한한 일이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생활적폐란 조어는 참 잘못 만들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안 그래도 어떤 사안을 ‘적폐’로 규정하는 것 자체에 뚜렷한 진영 논리가 작용하고, 이를 쓸어버려야 할 대상으로 삼는 것에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는 판이다. 거기에 생활을 묶어 ‘생활적폐’란 말을 만들어 내다니…. 공권력이 내 삶, 내 생활 속까지 직접적으로 훅 들어올 거란 느낌을 주는 위압적인 단어다.”
 
“생활적폐라니, 도대체 뭘 말하는지 모르겠다. 어느 분야를 타깃으로 해서 턴다는 얘기인가”라는 ‘생존 본능’의 질문도 다른 기업체 관계자에게서 나왔다.
 
민정수석실의 설명에 따르면 ‘생활적폐’란 채용비리·학사비리, 토착비리, 공적자금 부정수급, 재개발·재건축 비리, 경제적 약자를 상대로 한 불공정·갑질행위 등 민간 분야에서 벌어지고 있는 ‘적폐’들을 말한다. 먹이사슬의 제일 아래에 있는 최약자를 빼고는 대·중·소기업을 가리지 않고, 대부분의 기업들에 해당되는 분야다.
 
경제엔 흑과 백, 한쪽으로만 몰아붙일 수 없는 회색 지대가 존재한다. 한쪽의 ‘을’이 다른 쪽엔 ‘갑’이 될 수도 있다. ‘을’이라는 대기업 정규직 노조는 비정규직 노조엔 ‘갑’이다. 대기업의 ‘을’인 1차 협력업체는 재하도급 업체엔 ‘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정부가 민간 분야 행위에 대해 ‘적폐’라는 규정을 지은 것, 생활과 적폐를 붙인 단어를 만들어 낸 것,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나서 이를 척결하겠다고 공언하는 것 모두가 불안감을 부추기는 일이다.
 
민정수석실의 발표 하루 만에 “경쟁 회사의 생활적폐, 갑질횡포 사례를 제보해 주면 속속들이 파 보겠다”는 방송사들의 취재 요청이 기업들에 쇄도하고 있다고 한다. 경제 주체에 공포를 불어넣는 씁쓸한 일이 계속되고 있다.
 
최지영 산업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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