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뭐든지 잘해야지…모범생증후군 버리세요"

중앙일보 2018.05.02 23:59 종합 27면 지면보기
서울 원남동에서 만난 '서늘한여름밤' 이서현씨. 사진 최정동 기자.

서울 원남동에서 만난 '서늘한여름밤' 이서현씨. 사진 최정동 기자.

어린 시절 부모님은 자주 싸웠다. 불안한 마음을 감추고 믿음직한 장녀로 자랐다. 마음은 늘 지치고 아팠다. 왜 이렇게 아플까. 마음을 잘 알고 싶어 고려대 심리학과에 진학했다. 남들에 뒤처지지 않으려 열심히 공부했고 2015년 석사학위를 딴 뒤엔 대형병원 상담사가 됐다. 바랐던 안정적인 직업을 가졌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보고서의 글씨체가 다르다고 ‘깨는’ 조직 문화에 백일을 못 버티고 퇴사했다. 백수가 되자 타블릿 PC로 그림일기를 그려 SNS에 올리기 시작했다. 이서현(30)씨가 그린 ‘서늘한여름밤에 내가 느낀 심리학 썰’은 이렇게 탄생했다.  
이씨가 최근에 쓴 그림일기의 한 부분 [사진 서늘한여름밤 블로그]

이씨가 최근에 쓴 그림일기의 한 부분 [사진 서늘한여름밤 블로그]

단순한 그림에 담아낸 마음 속 복잡한 감정을 들추보는 이야기. 그의 일기로 자기 마음을 들여다봤다는 독자는 점점 늘었다. 조회 수는 꾸준히 올라 지난해 첫 번째 책 『어차피 내 마음입니다』를 출간했다. 그 사이 이씨는 결혼을 했고 팟캐스트 방송을 시작했다. 일상이 바뀐 만큼 자연스레 기혼 여성으로 느낀 성차별적 시선이 일기에 담겼다. 그 과정을 볼 수 있는 두 번째 책 『나에게 다정한 하루』가 20일 출간했다.  

'서늘한여름밤' 웹툰 작가 이서현씨
심리학 석사 뒤 대형병원에 상담사 취업
조직문화에 질려 100일도 못 버티고 퇴사
기혼녀로 느낀 성차별 책 '나에게…' 출간

 
첫 번째 책과 달리 페미니즘적 성향이 보이는 에피소드가 많다.
“건축가인 남편과 가까워지며 그가 남자로서 누려온 세계를 보게 됐다. 남편은 유리 천정, 임신과 출산으로 인한 경력 단절 등을 아예 생각해 본 적이 없더라. 성차별이 중력처럼 당연하게 여겼던 내 과거에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이를 인정하는 시간이 필요해지더라.”
'우리의 관계는 막 시작되었다' 에피소드의 한 장면. [서늘한여름밤 블로그]

'우리의 관계는 막 시작되었다' 에피소드의 한 장면. [서늘한여름밤 블로그]

명절에 시댁을 가지 않겠다고 선언한 내용도 있다.
“악플이 많이 달렸다(웃음). 하지만 응원하는 댓글도 많았다. 50~60대 여성분들이 비밀 댓글로 ‘젊은 세대라도 당당하게 살 수 있어서 다행’이라 말해주시더라. 여성으로서 부당한 상황을 맞닥뜨리면 마음에 분노가 인다. 페미니스트로 어떻게 정신건강을 지키며 살 수 있을까 많이 고민했다. 지금 많은 여성이 느끼는 분노는 사회 변화를 위해 꼭 거쳐야 하는 단계인 것 같다. 요즘엔 어떤 대의보다 중요한 건 ‘지금 나의 행복’이라 되새긴다.”
 '우리의 관계는 막 시작되었다' 에피소드의 한 장면. [서늘한여름밤 블로그]

'우리의 관계는 막 시작되었다' 에피소드의 한 장면. [서늘한여름밤 블로그]

나의 행복을 위해선 어떻게 마음을 다잡아야 할까.
“스스로에게 솔직해지기. 그러려면 자신에게 자주 물어야 한다. ‘기분이 어때? 지금 불편해? 뭘 하고 싶어?’라고. 그게 ‘나에게 다정한 하루’를 만드는 길이다. 그 전엔 그러지 못했다. ‘뭘 해야 하지? 내 인생 망하면 어떻게 하지?’ 하며 초조해하는 모범생이었다. 불안을 끊임없이 주입하는 사회 분위기 영향도 컸고. 예전엔 불안을 멈출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못했다.”
변화의 계기는 퇴사였나.
“퇴사 후 심리 상담을 8개월 간 받으며 ‘잠깐 머뭇거렸다고 나빠질 인생이라면 지금 당장 망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바뀌었다(웃음). 또 그림일기를 통해 SNS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며 힘이 많이 났다. 10~20대 때는 개인의 가치를 아무렇지도 않게 ‘후려치는’ 환경에 자주 상처받받았다. 안정과 젊음을 갖춘 30대가 되니 마음이 편하다. 그런 만큼 나보다 어린 세대를 위해 더 목소리를 내고 싶다.”
사진 최정동 기자.

사진 최정동 기자.

심리 상담의 진입 장벽은 여전히 높다. 사회적 분위기와 비용 때문인 것 같은데.
“1회 평균 상담 비용이 8만원, 20회면 160만원이다. 상담비가 왜 이리 비싸냐고 묻기보단 ‘내 마음에 쓰는 이 정도 돈이 왜 비싸게 느껴지는지, 왜 국가적 지원은 거의 없는지’ 물어야 한다. 한국 사회는 무형의 서비스에 돈을 지불하는 것에 낯설다. 동시에 우울증 환자 비율과 자살률은 계속 높아지고 있다. 이런 경우 나라가 정책적 지원을 해야 하는데 실제론 전문 인력에게 줄 비용을 줄이는 경우가 많다.”  
 
그가 지난해 8월 젊은 상담사 8명과 함께 차린 상담센터 에브리마인드에선 개인 상담뿐 아니라 워크숍 프로그램을 함께 진행 중이다. 심리학 문화살롱 등 다양한 주제를 통해 심리 상담의 벽을 낮추기 위해서다. 개인 상담에 비해 가격도 저렴하다. 
 
“스스로를 보살피는 여러 방식 중 하나죠. 눈에 띄는 증상이 없는 보통 사람도 마음을 돌아보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때 오면 좋아요. ‘현실은 나를 어떻게 얼마나 짓누르고 있는가,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생각하며 늘 내가 나의 편이 되면 좋겠습니다.”  
김나현 기자 respiro@joongang.co.kr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