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우리가 바로 차세대 정현 … "현이 형, 곧 따라갈게"

중앙일보 2018.05.02 06:07
전 세계에서 열리는 대회에 참가하는 프로 테니스 선수의 삶은 힘들다. 1~2주마다 비행기를 타고 이동해야 하고, 입에 잘 맞지 않는 음식도 먹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만족스러운 경기력을 발휘하기 위해선 다른 선수들보다 빨리 시차를 극복해야 한다. 이렇게 노력해도 세계 100위 안에 드는 건 하늘의 별 따기다. 그래서 대부분의 선수들은 프로에 도전하다가도 주저앉는다. 
 
정현 뒤를 쫓아가는 테니스 차세대 선수들 이덕희-권순우-정윤성이 30일 서울 방이동 올림픽테니스장에서 포즈를 취했다. 오종택 기자

정현 뒤를 쫓아가는 테니스 차세대 선수들 이덕희-권순우-정윤성이 30일 서울 방이동 올림픽테니스장에서 포즈를 취했다. 오종택 기자

 
그런데 최근 한국 테니스에선 프로 선수에 도전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한국 최고 랭킹(19위) 기록을 쓴 정현(22)을 필두로 권순우(21), 이덕희(20), 정윤성(20) 등이 세계 무대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세계 200위대인 권순우(204위)와 이덕희(219위), 400위대인 정윤성(440위)은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도전하고 있다. 
 
'차세대 정현'을 노리는 세 명을 지난달 30일 서울 올림픽 공원에서 만났다. 비슷한 또래인 셋은 만나자마자 활짝 웃으면서 반가워했다. 청각장애 3급인 이덕희가 어눌하게 말하지만, 코트에서 오랜 시간 함께해 온 권순우와 정윤성은 잘 알아듣고 대화를 나눴다. 이덕희는 "외국에서 경기에 나가는게 아무래도 힘들다. 그래도 다른 나라 선수들하고 경쟁을 하면서 경험을 쌓는게 재미있다"고 했다. 권순우도 "처음엔 먹는 게 많이 달라서 힘들었는데 이젠 적응했다. 현이 형을 보면서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고 당차게 말했다. 
 
정현 뒤를 쫓아가는 테니스 차세대 선수들 이덕희, 권순우, 정윤성이 30일 서울 방이동 올림픽테니스장에서 포즈를 취했다. 오종택 기자

정현 뒤를 쫓아가는 테니스 차세대 선수들 이덕희, 권순우, 정윤성이 30일 서울 방이동 올림픽테니스장에서 포즈를 취했다. 오종택 기자

 
세 명은 정현이 뛰는 남자프로테니스(ATP) 투어 대회가 아닌 한 단계 낮은 ATP 챌린저 대회를 뛰고 있다. 주로 세계 랭킹 100위에서 300위 사이 선수들이 출전한다. 지난달 28일 서울 올림픽공원 테니스장에서 개막한 비트로 서울오픈챌린저대회(총상금 10만 달러)에도 나란히 참가했다. 권순우는 단식 1회전(32강)을 통과해 16강에 올랐다.
  
주니어 때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권순우는 혜성처럼 등장했다. 지난해 세계 308위를 1년동안 챌린저 대회에서 준우승을 두 차례나 차지하면서 168위까지 끌어올렸다. 올해 호주오픈에도 처음 출전했다. 비록 1회전에서 탈락했지만, 권순우의 참가로 정현과 함께 한국 선수 2명이 2001년 윔블던 대회(이형택·윤용일 출전) 이후 17년 만에 메이저 대회에 출전하는 쾌거를 썼다. 
 
2017 호주오픈 1회전을 앞두고 함께 훈련한 권순우(왼쪽)와 정현. [사진 스포티즌]

2017 호주오픈 1회전을 앞두고 함께 훈련한 권순우(왼쪽)와 정현. [사진 스포티즌]

 
이덕희는 듣지 못하는 핸디캡이 있지만, 코트 안에서는 파워 넘치는 플레이로 세계적인 관심을 받았다. 2016년 7월 만 18세 2개월의 나이로 세계랭킹 200위권 안으로 진입하면서 정현이 갖고 있던 국내 최연소 200위권 진입 기록(18세 4개월)을 갈아 치웠다. 그리고 지난해 4월 세계 130위까지 올랐다.  
 
정윤성은 주니어 시절 세계 10위 안에 들며 촉망받는 테니스 선수로 주목받았다. 지난 2016년 프랑스오픈 주니어 복식에서 준우승도 거뒀다. 하지만 지난해 성인 무대에 데뷔하고 나서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세계 1위 라파엘 나달(스페인)이 스페인 마요르카에 세운 테니스 아카데미에서 지난 1월 한 달 동안 동계훈련을 하면서 점점 슬럼프에서 벗어나고 있다.
 
정윤성(가운데)이 토니 나달(오른쪽), 조안 보스크 코치와 훈련을 마치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스포티즌]

정윤성(가운데)이 토니 나달(오른쪽), 조안 보스크 코치와 훈련을 마치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스포티즌]

 
세 명의 우선 목표는 '세계 100위 진입'이다. 세계 100위를 눈앞에 두고 떨어진 이덕희는 "최근 정체기이기는 하다. 랭킹이 떨어졌지만 실망하지 않고 다시 컨디션을 끌어올리고 있다"고 말했다. 키 1m75㎝·75㎏인 이덕희는 외국 선수들에 비해 작은 체격이 한계로 지적되고 있다. 그는 "서양 선수들이 체격이 커서 확실히 서브에 유리하더라. 그래서 나는 뒤에서 많이 뛰는 플레이를 하면서 상대가 빨리 지칠 수 있게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감정 기복이 컸던 정윤성은 마음이 급해질 때마다 자신의 발자국 소리를 듣거나 수건으로 땀을 닦으면서 스스로를 안정시키는 루틴을 만들어 극복하고 있다. 그는 "라파엘 나달을 키운 토니 나달이 나를 보고 '내년에는 꼭 100위 안에 들 것'이라고 해줘서 감사했다. 자만심을 내려놓고 열심히 하면 곧 100위에 오를 거라고 믿는다"며 웃었다. 
 
세 명은 테니스에 올인하기 위해서 공부도 잠시 접을 예정이다. 이덕희는 아예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다. 권순우와 정윤성은 건국대에 진학했지만 현재 휴학했다. 권순우는 "학사 과정이 엄격해져서 테니스와 공부를 병행하는 게 쉽지 않다. 자퇴도 고려하고 있다"며 "대학을 그만두는 걸 후회할 수 있지만, 지금은 사랑하는 테니스에만 올인하자는 마음으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2017 서울 오픈 챌린저 테니스 대회 기자회견에 나온 이덕희, 정현, 권순우(왼쪽부터). [사진 서울오픈 조직위]

2017 서울 오픈 챌린저 테니스 대회 기자회견에 나온 이덕희, 정현, 권순우(왼쪽부터). [사진 서울오픈 조직위]

 
정현은 항상 말한다. "같은 나라 선수들이 몇 명씩 함께 메이저 대회에서 뛰는 게 참 부럽다. 나도 우리 선수들과 함께 연습하고 싶다. 하루라도 빨리 메이저 대회에 출전하는 한국 선수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라고. 정현의 바람을 아는, 권순우·이덕희·정윤성은 이렇게 말했다. "현이 형, 기다려. 곧 따라갈게!"  
 
박소영 기자 psy0914@joongang.co.kr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