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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향한 北 첫번째 ‘행동’=풍계리 폐쇄 공개…냉각탑 폭파 '2차 쇼' 우려도

중앙일보 2018.04.29 17:16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7일 남북정상회담에서 풍계리 핵실험장을 5월중 폐쇄하고 이를 대외적으로 공개하겠다고 한 것은 그간 미국이 강조해온 ‘실질적 행동’의 첫 조치가 될 수 있다. 종전과 달리 첫 협의부터 북한의 절대권력자인 김 위원장이 나서는 ‘톱다운’ 방식이었기에 가능한 결정이었다.
 
청와대는 북한이 풍계리 핵실험장을 5월 중 폐쇄하고 이를 대외적으로 공개하겠다 했다고 29일 밝혔다. 우측 사진은 2008년 6월 27일 북한이 비핵화 의지를 밝히기 위해 영변 원자로의 냉각탑을 폭파하는 모습.[연합뉴스]

청와대는 북한이 풍계리 핵실험장을 5월 중 폐쇄하고 이를 대외적으로 공개하겠다 했다고 29일 밝혔다. 우측 사진은 2008년 6월 27일 북한이 비핵화 의지를 밝히기 위해 영변 원자로의 냉각탑을 폭파하는 모습.[연합뉴스]

윤영찬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판문점 선언에는 포함되지 않은 중대 합의 두 가지를 29일 공개했다. 북부 핵실험장(풍계리 핵실험장) 폐쇄에 한·미 전문가 및 언론인을 참관시키는 것과 평양 표준시를 서울 표준시에 맞추는 데 김 위원장이 합의했다는 것이다.
 
두 사안 모두 남북이 사전 조율한 의제는 아니었다. 회담 도중 전격 합의가 됐고, 문재인 대통령이 “이를 발표해도 되겠느냐”고 제안하자 김정은은 그 자리에서 “대외적으로 발표해도 좋다”고 답했다. 김정은은 한·미 언론에서 풍계리 핵실험장이 이미 상당 부분 붕괴돼 효용을 다했다고 지적하는 것을 의식한 듯 “일부에서 못 쓰게 된 것을 폐쇄한다고 하는데 와서 보면 알겠지만 기존 실험시설보다 더 큰 두 개의 갱도가 더 있고 이는 아주 건재하다”고 핵실험장의 구조까지 공개했다.
 
윤 수석은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 공개는 향후 논의될 북핵 검증 과정에서 선제적이고도 적극적으로 임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청와대는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 시점은 북·미 정상회담 이전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김정은이 미국에 보내는 신호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실제 최근 방한한 수전 손턴 미 국무부 동아태차관보 대행은 북한의 진정성 확인을 위한 실질적 조치로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를 언급했다. “지금까지 본 것은 북한의 말 뿐이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실제로 핵실험장을 폐쇄하는 것으로, 이는 좋은 신뢰구축 조치의 하나가 될 수 있을 것”(24일 언론 라운드테이블)이라고 말했다. 김정은이 사흘만에 이에 호응한 셈이다.
 
이런 파격 이면에 깔린 김정은의 의도에 대해선 여러가지 해석이 나온다. 북한은 2008년 6월 영변의 5MW 냉각탑을 폭파한 적이 있다. 6자회담 결과물인 9·19 공동성명의 후속조치인 10·3 합의에서 ‘영변의 5MW 실험용 원자로, 재처리시설(방사화학실험실) 및 핵연료봉 제조시설의 불능화’를 약속한 데 따른 것이었다. 폭파 장면을 성 김 당시 미 국무부 한국과장(현 주필리핀 미 대사)이 현장에서 지켜보고, 미 CNN 방송 등도 생중계했다. 미국은 같은해 10월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제외했다. 하지만 2013년 4월 북한은 원자력총국 대변인 명의로 “우라늄 농축 공장을 비롯한 영변의 모든 핵시설과 함께 5MW 흑연감속로(원자로)를 재정비, 재가동하는 조치를 취한다”고 발표, 모든 약속을 뒤집었다.
 
2018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27일 경기도 파주시 판문점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평화의 집으로 도보로 이동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판문점=한국공동사진기자단]

2018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27일 경기도 파주시 판문점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평화의 집으로 도보로 이동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판문점=한국공동사진기자단]

김정은은 이번 4·27 회담에서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 의지만 밝혔을 뿐 영변 핵시설은 언급하지 않았다. 영국 군사정보분석업체 IHS마킷의 앨리슨 에반스 아시아ㆍ태평양국가위기담당 부대표는 “북한은 미국과 동맹국들이 생각하는 비핵화는 여전히 꺼려할 것이 확실하다”며 “북한이 특정 핵실험장에 대한 사찰을 허용할 순 있어도 모든 핵시설에 대한 접근은 허용하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판문점 선언에 나타난 북한의 비핵화 의지가 얼만큼 명료했는지엔 여전히 의문부호가 달려있다. 판문점 선언은 3개 장(▶남북관계의 획기적 개선 ▶군사적 긴장 완화 노력 ▶평화체제 구축) 13개 조항으로 이뤄졌는데, 비핵화 문제는 맨 마지막인 13항에서야 언급됐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29일 기자들과 만나 ‘비핵화 관련 내용이 말미에 포함된 것이 양 정상의 막판 담판의 결과였느냐’는 질문에 “문구의 문제는 막판까지 조율한 것”이라고만 답했다. ‘원래 그 순서였느냐, 조정하다 보니 뒤로 간 것이냐’고 재차 질문하자 “자세한 실무적 협의 과정은 잘 모른다”며 즉답을 피했다.
 
박인휘 이화여대 국제학부 교수는 “새로운 한반도를 열어갈 준비라는 것은 북한의 구체적 비핵화 행동 조치를 전제로 한 것인데 그런 부분이 판문점 선언에는 없다. 비핵화 관련 내용이 독립적인 부분으로 다뤄졌다면 이를 곧 북한의 비핵화 의지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을텐데, 그렇게 되지 않은 점은 아쉽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청와대는 “육성을 포함, 여러 경로로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를 확인했다”는 입장이다. 윤영찬 수석은 “(김정은이)‘앞으로 자주 만나 미국과 신뢰가 쌓이고, 종전과 불가침을 약속하면 왜 우리가 핵을 가지고 살겠느냐’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는 지난달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특사단을 이끌고 방북했을 당시 내건 비핵화 조건과 유사하다. 정 실장은 김정은이 “북한에 대한 군사적 위협이 해소되고 북한의 체제 안전이 보장된다면 핵을 보유할 이유가 없다”고 밝혔다고 전했다(3월6일). 하지만 미국은 '조건 없는 비핵화'를 원하고 있다. 
한 여권 관계자는 “본격적인 비핵화 조치는 북·미 정상회담에서 논의될 것이기 때문에, 남북 정상회담에서 이 정도 언급을 한 것은 큰 상징적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반면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김정은이 대북 위협을 한·미 동맹과 연관지어 ‘위협이 다 해소된 뒤에 최종적으로 핵무기를 포기하겠다’는 의도라면 북·미 정상회담에서 상당히 난항이 예상된다”며 “이렇게 되면 핵은 뒤로 미루고 우선적으로 미 본토에 위협이 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부터 협상하겠다는 논리도 가능해진다”고 우려했다.
 
김정은의 체제안전 보장요구가 국내정치용 명분 쌓기라는 해석도 나온다. 우정엽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은 “북한이 지금까지 미국에 대항하는 수단으로 핵을 개발했다고 내부 선전을 해왔는데, 갑자기 핵을 포기하려면 주민들이 납득할만한 명분을 미국이 제공해달라는 의미일 수 있다”고 말했다.
 
유지혜·강태화·박유미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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