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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애니메이션 주인공 이름 달달 외우는 까닭

중앙일보 2018.04.29 15:00 종합 19면 지면보기
[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5)
지난해 11월 '1번' 손녀가 '2번' 손자가 들고 있는 우리집 고양이에게 고양이 간식을 주고 있다. [사진 송미옥]

지난해 11월 '1번' 손녀가 '2번' 손자가 들고 있는 우리집 고양이에게 고양이 간식을 주고 있다. [사진 송미옥]

 
딸이 결혼해 몇 년 후 ‘1번’ 손녀를 가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내 가슴은 두근거렸다. 다섯 살 때 친정엄마의 죽음으로 나도 오래 살지 못할 거라는 트라우마가 있었다. 내 딸이 어느새 자라 아이 엄마가 된다는 사실은 내 생전에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이 먼 이야기였던 터였다. 마치 내가 임신한 것처럼 배가 부르는 느낌도 들었다.
 
그러면서도 내가 할머니가 되면 세상에서 가장 멋진 모습으로 아이와 만나야지 하는 생각에 여성회관이나 YWCA 같은 곳에서 하는 교육 프로그램을 이수해 자격증과 수료증을 여러 개 따놨다.
 
육아 도우미, 산모 도우미, 환경 도우미, 이야기 할머니 등등 수많은 교육 프로그램을 수료하고 첫 손주랑 만난 지가 어언 8년이 됐다. 어느새 다섯 명의 손자·손녀가 병아리떼같이 졸졸졸 따라다니는 어린이집 원장급 수준의 할머니가 되었지만, 내가 받은 교육을 실행한 적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손주 출산 전 배운 육아 도우미 교육, 무용지물 돼
딸이나 며느리의 첫아이 출산서부터 할머니에겐 접근 금지 꼬리표가 붙었다. 많은 고급 지식을 매스컴이나 책으로부터 배운 박사급 산모는 내가 하는 방식은 가까이할 수 없는 너무 먼 구닥다리로 여겼다. 
 
내가 배운 것은 마음 한쪽에 처박혀 숨만 쉬는 형편이지만 엄마라는 이름으로 제 자식에게 하는 꼴이 매우 이쁘고 대견스러웠다. 내 교육 경험이 한쪽으로 찌그러져 있어도 기분이 좋았던 건 그래서다. 엄마가 되면 그렇게 스스로 알아가고 행동하는 그 무엇이 참 신기하다.
 
또 한편으론 내 주장만 우기게 되면 내 자식은 힘든 육아를 내게 일임해 버리고 기댈 것이다. 내가 슬기로운 젊은 엄마보다 못해 독박을 쓰면 젊은 할머니의 모습도 망가지게 되는 건 당연지사 아닌가. 그래서 딸이 혼자 육아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격려해주고 칭찬해주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아 그리했더니 참 잘한 것 같다. 예비 할머니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다. 앞으로 나서는 순간 피박이다.
 
사위와 딸은 갓 태어난 아이를 집에 데려와 우왕좌왕하며 목욕시키더니 이후엔 사위 혼자서도 곧잘 씻겼다. [사진 송미옥]

사위와 딸은 갓 태어난 아이를 집에 데려와 우왕좌왕하며 목욕시키더니 이후엔 사위 혼자서도 곧잘 씻겼다. [사진 송미옥]

 
한 예로 사위랑 둘이 갓 태어난 아이를 집에 데려와 첫 목욕을 시키는데 조리원에서 다 배웠으면서도 지켜보는 엄마에게 거들어 달라고 했다. 나는 불안한 목소리로 "너무 오래된 일이라 무섭고 물에 빠트릴까 봐 겁이 나니 둘이서 해봐. 물에 빠트리면 내가 아이를 건지는 당번 할게"라고 말하며 뒤로 물러섰다. 목욕 준비에만 한 시간이 걸려 급한 성격에 ‘욱~’했지만, 꾹 참고 지켜보기만 했다. 
 
어떤 위대한 행사도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요란스러웠다. 큰 수건 깔고 작은 수건 깔고 아이 옷 펴놓고 베이비 로션 진열해놓고…. 한쪽에선 사위가 아이 목욕통에 물을 받아놓고는 온도계를 넣었다 뺐다 난리이더니 드디어 아이를 욕탕에 넣었나 싶었는데 1분도 안 돼 끝이 났다. 그러면서 둘이 마주 보며 하는 말 "쉽네~ 우린 할 수 있다! 하하하" 이런다.
 
딸은 그렇게 아이를 셋이나 낳아 바깥 일은 남편이 하고 아이 키우는 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요즘은 세숫대야에서도 세 놈을 순식간에 몸을 씻기는 아이 목욕 전문가다.
 
요즘엔 욕조에 물을 받아주면 엄마 없이도 셋이서 한참을 놀다 나온다. [사진 송미옥]

요즘엔 욕조에 물을 받아주면 엄마 없이도 셋이서 한참을 놀다 나온다. [사진 송미옥]

 
틈틈이 아이를 등에 메고 집안일을 돕는 사위가 대견하기도 하지만, 가끔 애가 타서 달려가 아이를 봐주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근처에 사는 나지만 최대한 모른 체한다. 그렇게 해도 자식은 급하지도 않은 SOS를 시도 때도 없이 날린다.
 
며칠 전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아이들이 크니 대화가 솔솔 돼 드디어 '이야기 할머니' 강의가 먹힐 것 같아 온갖 그림책을 사놓고 연습을 한 다음 아이랑 마주 앉았다. 혹부리 영감 이야기를 해주려고 하니 "할머니 이런 거 말고 더 재미있는 거 없어요?" 이런다. 
 
"이게 가장 재밌는 이야기인데 어떤 게 더 재미있을까?" 하니 "신비아파트에 나오는 귀신 이름을 다 아세요? 포켓몬스터에 나오는 리자몽이요. 피죤투 아세요? 공룡 메카드 아세요? 공룡 이름이 티라노사우루스랑 미주알고주알…. 그리고 파워레인저 엔진포스 사주세요. 변신 로봇으로 세상을 구할 수 있어요." 한글도 못 읽는 녀석이 외국어로 된 이름은 어찌나 매끄럽게 잘 말하는지 대화가 안 된다.
 
애니메이션 '공룡 메카드' [사진 초이락콘텐츠팩토리]

애니메이션 '공룡 메카드' [사진 초이락콘텐츠팩토리]

 
손주에게 혹부리 영감 이야기해주려다 퇴짜맞아
내 머리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현실의 벽이다. 그래도 할머니는 너보다 머릿속에 더 많은 게 들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한 가지 꾀를 내었다. 옛날이야기 주인공에게 공룡이나 변신 로봇의 이름을 붙여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먹혀들었다. 아이들은 내 이야기를 들으며 신기한 듯 귀를 쫑긋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경청했다.
 
내 희망은 그 옛날 툇마루에 앉아 재밌는 이야기를 해주시던 할머니가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있듯,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추억재산을 남겨주고 싶다.
 
할머니라는 버릴 수 없는 명함을 위해 오늘도 나는 이상한 공부를 하고 있다. "신비아파트 주인공은 이등신·구하리·구두리·구인남·최강림, 주절주절…. 공룡의 종류는 티라노사우르스·브라키오사우르스·데이노스쿠스…."
 
송미옥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sesu32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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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미옥 송미옥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필진

[송미옥의 살다보면] 요양보호사 일을 하다 평범한 할머니로 지낸다. 지식은 책이나 그것을 갖춘 이에게서 배우는 것이지만, 인생살이 지혜를 배우는 건 누구든 상관없다는 지론을 편다. 경험에서 터득한 인생을 함께 나누고자 가슴 가득한 사랑·한·기쁨·즐거움·슬픔의 감정을 풀어내는 이야기를 쓴다. 과거는 억만금을 줘도 바꿀 수 없지만, 미래는 바꿀 수 있다는 말처럼 이웃과 함께 남은 인생을 멋지게 꾸며 살아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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