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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치 않는 성관계’를 한 후 ‘강간’을 당했다고 고소했다면 처벌받을까요? 얼마 전 확정판결이 난 ‘유명배우 A씨 무고사건’ 재판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 과정이었습니다.  
 
“모욕감, 수치심을 느끼고 눈물이 났습니다. 제가 아무것도 못 했다고 생각하니 속상하고, 집을 알려준 내가 잘못이라는 자책감에 너무 힘들었습니다. 나라는 사람을 쉽게 보고 다가왔다는 생각에 너무 힘겹습니다.(배우A씨를 고소한 여성B씨의 진술)” 
 
[일러스트 김회룡]

[일러스트 김회룡]

 
일반인 여성 B씨는 “분명하게 거부 의사를 밝혔음에도 배우 A씨에게서 원치 않는 성관계를 강요받았다”며 경찰서를 찾아옵니다. 우리 형법상 ‘강간’은 ‘항거를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협박’이 있는 경우를 말합니다. 그런 폭행이나 협박이 있었느냐는 질문에 B씨는 “옷을 벗기면서 실랑이를 하면서 거부 의사를 밝힌 것 말고는 특별히 강제적인 수단을 쓰지 않았다” “침대에 눕힌 후에는 더 이상의 거부를 하지 못하고 A씨가 하는 대로 따랐다”고 했습니다. 
 
배우 A씨는 강간 무혐의 처분을 받았지만, 여성 B씨의 거짓 고소(무고) 혐의가 남았습니다. B씨 사건을 받은 서울중앙지법은 1‧2심에서 각각 '무죄'와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으로 완전히 다른 선고를 내립니다. 1심은 “B씨가 두려움을 느낄 여지가 충분했다”며 B씨 입장에선 그런 고소를 할 수도 있다고 봤고, 2심은 B씨가 “내심에 반하는 성관계와 강간의 차이를 모를 리 없”는데도 거짓으로 고소하는 큰 죄를 저질렀다고 봤습니다. 이 재판은 검찰과 B씨가 대법원에 상고하지 않아 2심 결론대로 확정됐습니다.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한 법원에서 이렇게 정반대의 결론이 나온 이유는 뭘까요? 지금부터 그 여정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사건의 재구성: 두 판결로 본 1년 9개월 전 그날 
2016년 7월 12일, 공통된 지인이 있던 A씨와 B씨는 우연히 셋이서 저녁 식사를 하게 됩니다. 판결문에 드러난 1심과 2심의 시각 차이는 이 만남 이후 벌어진 일에서 시작합니다. 1심은 “블라인드 설치를 해 주겠으니 주소를 알려달라는 전화를 받았으나 괜찮다고 하였고” 라며 B씨가 한 차례 거절한 점에 주목했습니다. 반면 2심은 “주소를 알려달라고 한 지 10분쯤 지나 지도화면을 전송했다”고만 썼습니다. A씨는 "(B씨가) 집이 누추하다고 하긴 했지만, 거절의 뜻은 아니었다"고 주장했는데 2심은 이런 점을 고려했습니다. 
 
B씨의 집으로 들어온 A씨는 필요한 공구가 없어 블라인드 설치는 못 해줍니다. A씨는 촬영용 메이크업을 지우고 싶다며 B씨에게 화장실을 써도 되냐고 합니다. 그다음부턴 ‘라쇼몽 효과’처럼 두 사람이 기억하는 진실이 다르긴 합니다만, 우선 A씨의 말을 따라가 봅시다. B씨는 A씨가 화장 지우는 걸 도와주고, 갈아입을 티셔츠도 가져다줍니다. A씨는 이를 근거로 B씨와 성적 교감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소위 말하는 ‘그린라이트’로 받아들였다는 것이죠. 

 
하지만 1심은 'A씨의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게 성관계를 해도 좋다는 뜻이 아니다’고 딱 자릅니다. “B씨가 단순한 호의에서 이런 행동을 할 여지를 배제할 수 없으므로, 이런 사정만으로 B씨에게 성관계에 응하려는 의사가 있었다고 추정하기 어렵다”는 게 판결문에 적힌 내용입니다.
 
반면 2심 재판부는 A씨의 입장에 더 가까운 판단을 합니다. “A씨는 특히 티셔츠를 건네받고 나서는 B씨도 자신에게 성적 호감을 품고 있다고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A씨로서는 두 사람 사이의 ‘좋은 분위기’를 잘 살려서 성관계로 나아가려고 했을 것으로 보인다.” 2심 판결문의 내용입니다.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다음은 사건이 벌어진 후의 상황입니다. 2심은 '성관계 후 A씨가 샤워하는 동안 B씨가 침대 위에 담요를 깔았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이는 “함께 침대에서 친밀하고 따뜻한 분위기에서 대화를 나눴다는 정황”이고, 그래서 이는 곧 직전의 성관계가 “상호 동의로 이루어진 자연스러운 관계의 일환이었을 개연성을 강력하게 시사한다”는 것이 2심 재판부의 판단입니다.
 
한편 1심은 "B씨의 고소 경위가 매우 자연스럽다”는 점에 무게를 싣습니다. B씨는 다음날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강제적인 일을 당했다. 무섭고 힘들다”며 상담했고, 친구의 조언대로 일반병원을 갔다가 경찰병원에 들른 후 친구가 소개해준 변호사를 통해 경찰서에 고소하게 되는데, 1심 판결문엔 이런 과정이 11줄로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2심 판결문엔 사건 이후 고소에 이르게 된 과정이 3줄 정도로 간단합니다. 이 부분이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2심은 B씨가 병원에 간 게 “고소를 앞두고 증거 확보 차원에서 상담했을 수 있다”고 봤습니다.
 
라쇼몽: 입장 따라 다른 진실일까
한편 1심은 B씨가 왜 저항을 (안 한 게 아니라) 못했는지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A씨가 블라인드 설치를 해주겠다며 집으로 찾아온 지 얼마지 않아 B씨를 상대로 성행위를 한 점을 고려하면, B씨가 순간적으로 두려움을 느낄 여지도 충분하고 그런 두려움으로 인해 적극적 저항을 하지 못했다고 볼 수도 있다.”  
 
2심에는 B씨가 (A씨가 아닌) 다른 남성과 성관계를 한 적이 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한편 B씨는 C씨와 우연한 기회에 성관계를 가진 적이 있으나 연인관계로 이어지진 않았다. C씨는 B씨를 평소 성적으로 자유롭고 개방적인 쿨한 여성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사건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명시하지 않았지만, 판단을 하는데 필요한 ‘기초 사실’에 넣었습니다.
 
2심에는 또 “B씨가 주장하는 갑작스러운 사태 전개는, A씨의 입장에 설 때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 “당시 정황상 A씨가 급작스럽고 난데없는 수단을 썼을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배우인 A씨에게는 강간혐의에 연루되는 것만으로도 배우활동에 치명적인 타격” 등 A씨에 주장에 공감하는 표현들이 눈에 띕니다. 2심은 A씨가 체위 등 성관계 과정을 구체적으로 진술한 내용 등을 근거로 “본인에게 자칫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내용까지 가감 진술해 그 진술의 신빙성을 높인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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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는 없었지만 '폭력'도 없었다면
삽화=김회룡기자aseokim@joongang.co.kr

삽화=김회룡기자aseokim@joongang.co.kr

핵심은 두 재판부가 B씨의 죄를 재는 데 사용한 각기 다른 저울입니다. 1심은 ‘동의 여부’를 중요한 잣대로 가져옵니다. 판결문에 “A씨 진술에 의하더라도 둘 사이에 성관계에 대한 명시적 동의가 없었고, A씨가 B씨에게 의사를 간접적으로나마 물어본 적도 없다”고 적었습니다. 그래서 “B씨가 원치 않는 성관계를 했다는 부분에 있어서 일관된다”는 점에 집중했고, “B씨가 성관계 당시 및 직후에 느낀 수치감‧굴욕감‧자책감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는”데다가 “A씨를 모함할 의도로 허위 고소를 했다고 볼 사정도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며 무죄를 선고할 수 있었습니다.
 
2심도 동의가 없었다는 건 인정합니다. “(B씨가) 적극적으로 응했다기보다 A씨의 주도적·적극적 접근으로 성행위가 이뤄졌을 가능성” “내심에 반하여 또는 A씨의 설득에 못 이겨 마지못해 이루어졌다고 볼 여지”는있다고 봤습니다. 판결문엔 끝까지 고민한 흔적이 역력합니다. 판결문 양이 1심 것의 2배입니다. “남녀에게 특유한 시각·감성·처지 차이가 투영된 상대적인 문제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등 헷갈리는 마음도 솔직하게 적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2심이 B씨의 죗값을 무겁게 매긴 건, ‘항거불능 여부’에 주목했기 때문입니다. 2심은 “강간죄란 폭행‧협박으로 억압해 간음으로 나아가는 것”이라며 “이 사건에서 B씨의 항거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강압적 수단에 의해 성관계가 이뤄졌다고는 도저히 볼 수 없다”고 썼습니다. 결국 “A씨가 의도적으로 접근해 하룻밤 자신을 성적으로 이용했다고 오해한 나머지 B씨가 여성으로서 깊은 수치심을 느끼게 돼 이를 되갚아줄 요량으로 우발적으로” 거짓 고소하는 범죄를 저질렀다고 봤습니다.
 
'무결점한 피해자'와 '비동의 강간죄': 두 판결이 남긴 숙제
두 판결문을 전문가와 함께 살펴봤습니다. 서울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 배수진 변호사는 ‘무결점한 피해자’라는 개념으로 두 판결의 차이를 설명합니다. 배 변호사는 “1심에서는 발목을 잡거나 강제로 옷을 벗으라고 하는 등 B씨의 상식에 반하는 말과 행동에서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면, 2심은 혼비백산해 온몸을 다해 저항하는 ‘무결점한 피해자’를 상정해 놓고, 그와 비교했을 때 B씨는 ‘적당히 튕긴 것“ 정도로 본 것 같다”고 말합니다. “성범죄 피해자들이 수치스러움과 두려움 때문에 실제론 소리 지르고 도망치는 결정을 잘하지 못하는 현실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는 것이 배 변호사의 생각입니다.
 
정현미 이화여대 로스쿨 교수(젠더법 전공)도 2심 판결 내용에 아쉬움을 표했습니다. 정 교수는 “친절을 의심하거나 거절할 수 없어 집에 들어오게 한 것일 수 있는데 이를 성적 교감의 신호로 받아들이는 건 전형적인 착각”이라며 “A씨는 굳이 B씨의 집에서 화장을 지우겠다고 하는 등, 정황상 B씨의 마음에 비해 A씨가 한발씩 앞서서 행동한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했습니다. 강간죄와 무고죄를 두루 수임한 경험이 있는 한 14년차 변호사는 “2심 판결문 내용은 무고죄가 아니라 강간죄 판결인 것 같다. 피고인 입장에서 거짓 고소였는지를 판단한 것이 아니라 강간죄 규정을 기준으로 피고인을 평가했다”고 말했습니다.
 
‘동의하지 않은 성관계’는 우리 형법에서 말하는 ‘항거가 현저히 곤란한 성관계’인 강간보다는 훨씬 넓은 개념입니다. 최근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이 “강간죄 요건을 국제사회의 기준에 부합하도록 바꿀 필요가 있다. 동의 없는 성관계도 강간죄로 처벌할 수 있도록 법률을 개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법무부도 검토에 들어가긴 했지만, 이 사건이 벌어진 시점에서 우리 법을 기준으로 ‘동의하지 않은 성관계’가 강간이 아닌 것은 명백합니다. 배우 A씨가 강간죄 무혐의 처분을 받은 것은 그래서 당연하고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성 B씨가 거짓 고소로 벌을 받아야 하느냐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한 법원에서 여덟 달 만에 엇갈려 나온 이 두 판결은 우리에게 생각해 볼 거리들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판결 다시보기 시리즈
 
※‘판다’는 ‘판결 다시보기’의 줄임말입니다. 중앙일보 법조팀에서 이슈가 된 판결을 깊이 있게 분석하는 코너입니다. 
 
문현경 기자 moon.h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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