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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연의 시시각각] 링컨이 끝낸 남북전쟁

중앙일보 2018.04.27 01:26 종합 34면 지면보기
최상연 논설위원

최상연 논설위원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엔 정작 게티즈버그 전투에 대한 언급이 없다. 노예제나 남부에 대한 거론도 없다. 단지 간결하고 분명한 272개 단어로 모두의 조국에 대한 의무를 강조했다. 연설에 등장한 ‘위대한 과업’이란 노예 해방이 아니라 자치의 보전이었다. 오늘날에야 흑인까지 포함한 자치로 받아들이지만 연설 당시 링컨은 흑인 선거권을 전혀 내세우지 않았다. 그럼으로써 그는 당시 벌어진 전투를 단순한 내전이 아닌 민주주의와 민주주의 아닌 것의 싸움으로 규정했다.
 

정적에겐 협치 손 내밀었지만
민주주의 위해선 전쟁도 불사

그가 민주주의 아닌 것과의 싸움에서 지켜 내려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개별적인 것, 지역적인 것, 분열적인 것의 극복이었다. 국가 분열을 막을 수 있다면 노예제 폐지든 존속이든 상관없다고 말한 적도 있다. 남부가 일방적으로 연합을 탈퇴할 수 없는 것처럼 북부도 일방적으로 노예를 해방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다. 대신 반란을 진압하는 데는 매우 엄격했고, 심지어 무자비했다. 전쟁에 의존해야만 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봤다.
 
목적엔 철저했지만 수단엔 융통성을 뒀다. 연방 유지와 연방 유지를 위한 노예제 폐지란 목표에 도움이 되는지만 따졌다. 수단을 바꾸는 건 개의치 않았고, 표를 위해 반대 의원을 매수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물론 가장 큰 수단은 협치였다. 평생을 괴롭힌 정적 스탠턴을 전쟁장관에 임명할 땐 ‘내각에 왜 적을 임명하나’란 질문을 받았다. 그는 ‘원수는 죽여서 없애는 게 아니라 마음속에서 없애야 한다. 그를 기용하면 나는 적이 없어져 좋고 국민은 능력 있는 사람의 봉사를 받으니 좋다’고 답했다. 그런 협치로 최종 목표인 정치적 통합을 이뤄냈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링컨처럼 산적한 통합 과제를 안은 채 취임했다. 남북 대립 속에 국내 정치는 이리저리 찢겨 지역별·세대별 갈등과 대립이 날이 갈수록 격화하는 양상이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링컨과 달리 ‘깨끗한 정치’ ‘도덕 정치’란 수단을 앞세웠고, 코드란 잣대를 중시했다. 남과 나를 가르고 남에겐 엄격한 대결 정치에서 통합 목표를 달성하기란 힘겹다. 거대 야당과의 소모적 갈등은 그 결과물이다. 그래서 꾸준히 목표에 다가간 링컨과 달리 문 대통령은 여전히 소수파로 남아 있다.
 
문 대통령이 오늘 북한 김정은을 만난다. 민주주의와 비민주주의의 싸움이다. 민주주의 가치를 지켜내는 게 목적이고, 그러자면 오직 민주주의의 적인 핵무기에 집중해야 한다. 30년 넘게 비핵화 약속을 깬 북한이다. 김정은이 ‘완전한 비핵화’를 말하게 해야 한다. ‘핵 폐기 완료 날짜’를 2중, 3중으로 다짐받아야 한다. 핵 폐기 선물 같은 나머지는 모두 수단이다. 서로 좋은 얘기만 적당하게 나누다 남북 관계 진전이란 수단으로 축포를 터뜨리는 건 링컨의 리더십이 아니다.
 
링컨에게 남북전쟁이란 부부싸움처럼 서로 할 말이 많은, 그래서 선악이 구분되지 않는 내전이 아니라 가치 수호와 가치 파괴의 충돌이었다. 설사 아무리 참혹하다 해도 가치 수호는 양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게티즈버그 연설을 승전 기념 연설이 아니라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란 가치 지향의 내용으로 끝낸 건 그런 이유에서다. 링컨은 그렇게 남북전쟁을 끝냈다. 그런 뒤 게티즈버그를 국민 통합의 성지로 만들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정치인이 링컨을 자신의 이상적인 대통령 모델로 꼽는다. 화합과 소통, 포용의 리더십으로 오늘의 미국을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링컨은 정적들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노예제 폐지, 연방 유지란 가치와 목표엔 흔들리지 않았다. 전쟁을 피하기 위해 민주주의 아닌 쪽의 가치에 투항할 수는 없다고 연설했다. 거꾸로는 링컨의 방식이 아니다. 
 
최상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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