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정부, 법도 만들기 전에 대기업 금융사 ‘규제 3종 세트’ 폭탄

중앙일보 2018.04.26 01:02 종합 8면 지면보기
유광열 금융감독원장 직무대행(수석부원장·왼쪽 둘째)이 25일 오후 서울 여의도 금감원에서 ‘금융그룹 통합감독 업계간담회’를 주재하고 있다. [변선구 기자]

유광열 금융감독원장 직무대행(수석부원장·왼쪽 둘째)이 25일 오후 서울 여의도 금감원에서 ‘금융그룹 통합감독 업계간담회’를 주재하고 있다. [변선구 기자]

대기업 금융 계열사에 대한 금융 당국의 규제·압박 강도가 강해지고 있다. 공정한 경쟁의 장을 만들고, 편법 계열사 지원 같은 불공정한 관행을 없애겠다는 취지다. 고객의 돈을 맡아서 굴리는 금융사는 대주주 마음대로 고객 돈을 써선 안 된다는 게 당국의 판단이다. 하지만 법적인 근거가 뒷받침되지 않은 상황에서 ‘모범규준’ 등 애매한 방식으로 과도한 규제를 추진한다는 지적이다.
 

금감원· 공정위 등 팔 걷고 나서
금감원, 7개 그룹 금융사 임원 불러
계열사 지원 사례 하나하나 경고

대기업 금융 부문 통합감독 추진
법적 근거 없어 모범규준 내세워

김상조 취임 뒤 순환출자 85% 끊겨
전문가 “규제보다 투자 환경 조성을”

금융 당국의 규제는 ‘3종 세트’로 동시에 진행 중이다. 우선 금융그룹 통합감독 체계의 구축이다. 대기업 계열사를 금융과 비금융으로 나눈 뒤 금융 부문을 한데 묶어 통합적으로 관리·감독하는 것이 골자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금융회사를 계열사 자금조달 수단으로 활용해 동반 부실화를 초래하지 않도록 사전 예방 시스템을 구축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감독원은 25일 7개 그룹의 금융 계열사 임원들을 모아 금융그룹 통합감독 간담회를 열었다. 업계에선 삼성·현대차·롯데·한화·DB(동부)·교보·미래에셋이 참석했다. 유광열 금감원장 대행은 이 자리에서 “일부 계열사의 문제가 금융그룹 전체의 지배구조 문제로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금감원은 일곱 가지의 ‘그룹 리스크(위험) 사례’를 들었다. 그중에는 현대차가 판매하는 자동차에 현대캐피탈이 할부금융을 집중 제공하는 것과 삼성생명이 삼성중공업의 유상증자에 참여한 것도 포함됐다. 금융 계열사가 비금융 계열사를 돕는 게 경우에 따라 고객 이익에는 반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서정호 금감원 금융그룹감독실장은 “금융회사를 동원한 계열사 지원은 진정한 외부자금 조달로 보기 어렵다”며 “계열사 경영이 악화하면 금융회사로 부실이 옮겨가면서 건전성이 나빠지고, 불건전 영업행위에 따른 평판 훼손과 고객 이탈 등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문제는 현재까지 법적인 근거가 없다는 점이다. 오는 9월 정기국회 이전에 법안을 제출하는 게 금융위원회의 목표다. 법안이 제출돼도 여소야대 국회에선 통과된다는 보장이 없다.
 
금융 당국은 법 대신 애매모호한 ‘모범규준’을 내세워 밀어붙일 태세다. 오는 7월 시행을 목표로 초안을 공개했다. 금감원은 올 하반기에 모범규준을 얼마나 잘 지키는지 현장점검을 하겠다고 예고했다. 모범규준은 법이 아니라서 강제성이 없는 권고만 가능하다.
 
‘3종 세트’의 두 번째는 보험업법이다. 이종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법안이 국회에 제출돼 있다. 보험사의 총자산과 계열사 주식을 모두 시장가격으로 평가하고, 총자산의 3%가 넘는 계열사 주식은 7년에 걸쳐 처분하라는 게 법안의 골자다. 만약 법안이 원안대로 통과되면 삼성생명은 현재 보유한 삼성전자 등 계열사 주식 중 약 20조원어치를 팔아야 한다.
 
현재 보험업 감독규정에 따르면 보험사의 총자산은 시장가격으로, 계열사 주식은 취득 당시 장부가격으로 평가한다. 서로 다른 기준을 시장가격으로 일치시키자는 게 정부와 여당의 판단이다.
 
시장에선 위험 요인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한꺼번에 팔자 매물이 쏟아지면 국내 증시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 삼성전자의 외국인 지분율이 50%를 넘는 상황에서 경영권이 흔들릴 수도 있다. 19대 국회에서도 같은 법안이 발의됐지만 결국 임기가 끝나면서 자동 폐기됐다.
 
국회 논의가 지지부진하자 금융위가 나섰다. 최 위원장은 “법률이 개정될 때까지 해당 금융회사가 아무런 개선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국민의 기대에도 부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법 개정 전에 자발적으로 실행하라는 압박이다.
 
하지만 법안의 통과는 장담하기 어렵다.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반대 입장이다. 국회 정무위원장을 맡은 김용태 자유한국당 의원은 “기업활동 잘하던 곳에 악영향을 주고, 기업활동의 예측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하는 법”이라고 말했다.
 
금융회사 지배구조법은 ‘3종 세트’ 중 유일하게 통상적인 정부 입법 절차를 밟고 있다. 금융회사 대주주의 자격심사 대상을 ‘사실상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주’로 확대하고,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위반으로 금고형 이상을 받은 경우 결격 사유로 규정하는 내용이다. 금융회사 이사회에서 사외이사의 권한과 역할을 강화하고, 최고경영자(CEO)의 ‘셀프 연임’을 방지하는 조항도 법안에 담겼다.
 
전문가들은 규제를 하더라도 법적 절차를 지키면서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오정근 건국대 금융IT학부 특임교수는 “편법 승계는 당연히 규제해야 한다”면서도 “정부가 특정 기업의 지배구조에 대해 과도하게 집착하는 것은 해외 사례를 찾아봐도 유례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공정거래위원회도 대기업의 순환출자 고리를 끊으라는 압박을 계속하고 있다. 이미 기업이 자체적으로 순환출자를 해소하는 중인데도 바로 고리를 끊으라는 식으로 밀어붙이는 형국이다. 기업은 당장 순환출자 해소를 위해 많은 비용을 쓰게 돼 그만큼 투자·고용 여력이 줄 수 있다.
 
공정위에 따르면 자산 5조원 이상 공시 대상 기업집단 57곳의 순환출자 고리 수가 지난 20일 기준 41개밖에 남지 않았다. 지난해 9월 1일(282개)에 비해 약 8개월 만에 241개(85%)가 사라졌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경영학부 교수는 “기업이 사정에 맞게 순환출자를 해소하는 중인데 정부가 일률적인 잣대로 몰아붙이면 기업의 활력은 줄어든다”고 말했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지금은 기업이 투자와 고용을 활발히 하도록 정부가 환경을 만들어 줘야 하는 상황”이라며 “과다한 규제보다는 기업이 연구개발(R&D)에 투자를 늘리고, 협력업체와 상생할 수 있도록 길을 터줘야 한다”고 말했다. 
 
주정완·하남현 기자 jwjoo@joongang.co.kr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