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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초] 1896년 '거상' 박승직이 연 포목점, 근대 자유 상거래의 바람 일으키다

중앙일보 2018.04.26 00:02 부동산 및 광고특집 2면 지면보기
두산그룹 효시 '박승직 상점' 
 

육의전 폐지 기회로 교통요지 선점
전차 완공되며 일대 중심상권 부각
신용본위 기치로 개점 초부터 순항

1896년 8월 1일(음력 6월 말일), 박승직은 서울 이주 7년 만에 서울 종로4가 15번지에 ‘박승직상점’을 개설했다. 10여 년 동안 근면·절약하며 전국을 누빈 끝에 꿈을 이룬 것이다. 이것이 두산그룹 100년 역사를 여는 시작이었음을 당시 33세였던 박승직은 알았을까.
2층으로 증축한 박승직상점 1층 소매부의 1934 년 당시 모습. 이후 동양맥주와 두산산업 사옥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2층으로 증축한 박승직상점 1층 소매부의 1934 년 당시 모습. 이후 동양맥주와 두산산업 사옥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우리 근대사의 흐름을 볼 때 박승직의 개업 시기는 적절했다. 1894년 단행된 갑오개혁으로 육의전(六矣廛)이 폐지됐다. 특권을 누릴 만한 배경이나 물려받은 재산과 거리가 먼 박승직은 이를 보며 호기가 왔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육의전의 시전인(市廛人)은 자신의 취급 상품을 일반 상인은 거래하지 못하게 하는 특권을 관으로부터 받았다. 그 결과 종로 일대 일반 상인은 불이익을 당하였으며 아예 발을 붙이기 어려웠다. 또 당시 청국과 일본 상인의 상권 장악이 나날이 심각해지며 국내 상계는 침체를 맞고 있었다. 육의전 폐지는 일반 상인의 상행위 자유화를 의미했으며, 조선 상계에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가 됐다.
1938년 6월 5일, 박승직상점의 전 직원이 금강산으로 야유회를 가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1938년 6월 5일, 박승직상점의 전 직원이 금강산으로 야유회를 가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이런 전환기에 박승직은 상계 진출의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육의전 특권이 잔재하는 상황이라 종로의 중심가에 자리 잡지 못한 것이 한편 아쉽기는 했지만, 그는 배오개에 자리를 잡는 것도 좋을 것으로 판단했다. 배오개는 18세기 전반부터 사상도고(私商都賈·관의 허가 없이 개인적으로 활동하는 자본력이 큰 상인)의 근거지로 상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한반도 동북방 상품과 삼남 지방의 상품이 들어오는 통로의 교차지로서 장점을 갖고 있었다.
 
박승직은 물자 교류가 활기를 더해가는 추세를 고려할 때 전통 상가와 청·일 상인의 본거지에서 경쟁하는 것보다 개척지에 힘을 쏟는 것이 나을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실제 상점 설립 2년 후인 1898년 10월, 서대문~동대문~청량리 전차노선이 착공돼 이듬해 5월 완공됨으로써 동대문 일대와 종로 4~5가는 전통과 근대가 어우러지는 새로운 중심상가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1930년 당시 박승직상점이 동양염직 제품 특약발매점임을 알려주는 현판.

1930년 당시 박승직상점이 동양염직 제품 특약발매점임을 알려주는 현판.

 
점포 개설을 위한 출자는 박승직 단독으로 했지만, 점포 가옥은 중형인 승기 소유였고 임대료는 없었다. 형제간의 이런 신뢰와 협조는 맏형 승완과 의논해 살림집 두 채를 구입했던 때나 승완이 사망하자 승직이 조카들을 친자식처럼 키운 데서도 엿볼 수 있다. 박씨 일가의 돈독한 우애는 2·3세로 내려가며 이어지고 있다. 점포 건물과 토지는 30년 후인 1927년 한성은행의 대부금 1만4000원에 4000원을 더한 1만8000원으로 매입하게 된다.
 
박승직상점은 신용본위를 기치로 내걸고 순항했다. 박승직 자신이 환포상으로 입지를 다진 만큼 초기에는 한국산 목면을 주로 취급했으나, 점차 수입 면포를 취급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 무렵 기계로 대량생산한 양포의 수입이 급증하며 시장환경이 급변했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나라에 유입된 면포는 청일전쟁(1894년) 전까지는 주로 영국 제품이었으나 이후에는 일본 제품인 옥양목이 점유율을 높여갔다. 옥양목은 영국 제품보다 질은 낮았지만 값이 싸서 한국산 목면의 입지를 잠식했다. 1905년이 되자 일본 제품은 영국 제품을 압도했다. 1887년 개방된 우리나라의 면직물 수입액은 박승직상점이 설립된 1896년 전체 시장의 70~80%에 달했고, 1903년까지도 50%를 차지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산 목면만 취급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안목을 넓혀 발전적 미래를 도모해야 할 시기가 됐던 것이다.
1930년대 중반 박승직상점의 상상도.

1930년대 중반 박승직상점의 상상도.

 
박승직상점은 전국의 포목상을 대상으로 물품을 도매했다. 경기도 연천, 강원도 철원과 평강 등지에 지점을 설치하고 판매망을 넓혀나갔다. 취급 품목도 다양화했다. 1915년 사용했던 ‘무역상 박승직상점’의 봉투에 인쇄된 선전문구에는 주단·포목 외에 방적사류·곡류·염류·부정(釜鼎·솥) 등도 취급 품목으로 들어가 있다. 이후 도량형기의 위탁판매도 맡았다. 1925년 주식회사로 개편한 뒤에는 모직 및 양속(洋屬)·면화·저포 등으로 범위를 확대했다. 이는 취급 가능한 품목을 넓힘으로써 명실상부한 무역상으로 발전하려는 의지의 발로였다.  
 
김승수 객원기자 kim.seungs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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