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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인연…전쟁 때 날 살려준 사람들

중앙일보 2018.04.21 11:01
[더,오래] 김길태의 91세 왕언니의 레슨(9)
6·25전쟁 당시 인민군과 피난민에 섞여 산으로 후퇴하면서 소백산맥 깊은 산골의 외딴집에 머물게 되었다. (내용과 연관없는 사진) [사진 에피파니]

6·25전쟁 당시 인민군과 피난민에 섞여 산으로 후퇴하면서 소백산맥 깊은 산골의 외딴집에 머물게 되었다. (내용과 연관없는 사진) [사진 에피파니]

 
나는 지금도 소백산맥 깊은 산골의 외딴집을 잊지 못하며, 이름도 모르는 그분들의 은혜를 갚지 못한 것이 마음 아프다. 6·25 때 이북으로 끌려가지 않고 살 수 있게 된 인연이 깊은 집이요, 고마운 사람들이다. 내가 인민군과 피난민 속에 섞여 지내다가 부모님이 사는 부산에 가게 된 계기가 거기서 만들어졌다.
 
그 산골 집은 방바닥에 빨간 진흙을 발라 문지르고 또 문질러 돌같이 반들반들하게 빛이 났고 집 앞에 밤나무와 조그만 텃밭이 있었으며, 우리보다 어린 손녀딸과 할아버지·할머니가 같이 살고 있었다. 우리는 전세가 불리해진 인민군과 피난민에 섞여 산으로 후퇴하면서 소백산맥 줄기를 타고 그곳까지 내려갔다. 나와 그 집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인민군 장교에게 산골 집에 머물겠다고 하니 쾌히 승낙
그 집에서 먹은 보리밥과 밀가루에 버무려 솥에 찐 고추반찬은 진수성찬에 비할 수 없이 맛있었다. (내용과 연관없는 사진) [중앙포토]

그 집에서 먹은 보리밥과 밀가루에 버무려 솥에 찐 고추반찬은 진수성찬에 비할 수 없이 맛있었다. (내용과 연관없는 사진) [중앙포토]

 
우리가 머물던 집은 경북 상주와 가까웠다. 상주라는 말을 듣는 순간 부모님과 집이 멀지 않았다는 생각이 스쳤다. 친구와 같이 인민군 장교에게 “이곳이 친구의 고향이고 집이 가까우니 우리를 여기 두고 가면 집에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니 쾌히 그렇게 하라고 승낙했다. 그때부터 우리는 그 집의 신세를 지게 됐다.
 
얼마나 있었는지 기억에는 없다. 국군의 인민군소탕 작전이 있을 때까지 숨어 살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집 사람들은 천사와 같이 순진했다. 자기들도 먹고살기 힘든 전쟁 통에 밥을 축내는 나와 친구가 얼마나 짐스러웠겠는가.
 
그때 그 밥과 반찬은 잊을 수가 없다. 흰쌀 한 톨도 보이지 않는 보리밥인데 가마솥에서 얼마나 푹 익혔는지 보리밥 같지 않게 입안에서 그냥 녹아 없어졌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밥이었다. 
 
반찬은 텃밭에서 따온 고추를 밀가루에 버무려 솥에 찐 다음 간장과 참기름에 무친 것으로 진수성찬에 비할 수 없이 맛있었다. 간식은 밤송이를 발로 문질러 터져 나온 밤을 입으로 껍질을 벗겨 먹은 하얗고 달콤한 밤알이었다. 그 또한 얼마나 맛있었는지…. 지금 나오는 밤은 밤이 아닌 것 같다.
 
그렇게 얼마나 머물렀는지는 몰라도 꽤 오래 있었다. 인민군 잔당 소탕작전이 시작된 어느 날 군인과 경찰관이 낮에 우리를 찾아왔다. 우리는 의과대학 학생이며 근처가 내 친구의 고향이라고 말했다. 친구 오빠의 이름과 주소를 대며 집에 가고 싶다고 했다. 군인들은 사실 확인을 할 때까지 아무 데도 가지 말고 기다리고 있으라며 돌아갔다. 
 
얼마 후 다시 찾아와서는 신분이 확실하니 같이 가자고 했다. 지옥에서 살아나온 듯 뛸 듯이 기뻤다. 친구의 오빠가 국회의원 출마자이고 집안이 상주에서 이름있는 부자여서 쉽게 사실확인이 된 덕분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우리 집 부산까지 가려고 했지만, 신분증도 없고 경계가 삼엄해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마침 해군으로 근무하는 그 집의 친척 동생이 휴가차 나와 인사하러 들렀다. 하늘이 도운 것이었다. 그 해군을 따라 아무 검문도 받지 않고 아무 탈 없이 편안하게 부산 집까지 올 수 있었다.
 
무남독녀 딸이 죽었다는 헛소문 돌아  
지금은 너무 많이 변해 찾을 수 없지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감사한 사람들. [일러스트=김회룡]

지금은 너무 많이 변해 찾을 수 없지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감사한 사람들. [일러스트=김회룡]

 
그 산골에서 먹은 밥과 밤 덕분에 뽀얗게 살이 쪄서 갔는데 집은 초상집 분위기였다. 동네 오빠가 헛소문을 듣고 와서 내가 죽었다고 했단다. 아버지는 매일 술을 마시며 딸이 길가 어디서 죽었는지도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편히 자겠느냐며 집 밖에서 주무셨다고 한다. 어머니도 매일 눈물 속에서 밥 한술 뜨지도 못하니 집안 꼴이 말이 아니었다. 
 
무남독녀인 딸이 죽었으니 집이 망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 딸이 뽀얗게 살이 쪄 건강한 모습으로 걸어오니 집에 경사가 났다.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잔치를 벌였다.
 
그 후 사상범으로 몰려 소년원에 수감되는 등 혹독했지만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사건을 겪으며 시간이 흘러갔다. 다행히 다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고 가정을 이루고 의사가 되었다. 당시 살벌한 정치·사회적 분위기에다 사상범으로 소년원 수감까지 된 내 과거 때문에 소백산맥 산골의 그 집을 찾아가지 못했다.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시대가 변해 내 과거가 아무것도 아닌 게 되고 편안한 가정을 갖게 되자 그분들 생각이 났다. 상주 친구를 만나 소백산맥의 그 집을 찾을 수 있는지 물었다. 친구는 너무 많이 변해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그렇게 은인의 집을 다시 찾지 못하고 가슴속에 묻어야만 했다.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은인이요, 감사하고 또 감사한 사람들이다.
 
김길태 산부인과 의사 heesunp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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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태 김길태 산부인과 의사 필진

[김길태의 91세 왕언니의 레슨] 90세에 새 삶을 찾아 나선 대한민국 1세대 여의사. 85세까지 직접 운전하며 병원을 출퇴근했다. 88세까지 진료하다 노인성 질환으로 활동이 힘들어지자 글쓰기에 도전, ‘90세의 꿈’이라는 책을 출판하고 문인으로 등단했다. 근 100년 동안 한국의 역사만큼이나 굴곡진 인생을 살면서 웃음과 꿈을 잃지 않고 열정적으로 삶에 도전해 온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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