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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일우 4·27회담,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라

중앙선데이 2018.04.21 01:08 580호 29면 지면보기
[FOREIGN POLICY] 대동강변 트럼프 타워를 상상하며
지난달 5일 방북한 정의용 수석 대북특사가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과 악수하고 있다. 김 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의 친서를 들고 있다. 오른쪽은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 제1부부장. [사진 청와대]

지난달 5일 방북한 정의용 수석 대북특사가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과 악수하고 있다. 김 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의 친서를 들고 있다. 오른쪽은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 제1부부장. [사진 청와대]

‘평창’의 나비효과가 한반도, 동북아시아의 국제질서 개편을 예고하는 태풍을 몰고 왔다. 사태는 우리의 상상력이 따르지 못할 만큼, 이래도 괜찮은지 걱정될 만큼 급진전하고 있다. 한반도 문제 하나에 남북한과 주변 4강의 정상들이 총출동한 전례가 없다. 19세기 말~20세기 초 대한제국의 황혼기에 조선반도의 현상유지 세력과 현상타파 세력이 충동할 때도 전면에 나선 것은 외교적 실무자들과 지휘부의 군인들이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미국은 1905년 조선 몰래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하여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하는 대신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받았다. 세력권 나눠 갖기의 전형이다. 얄타체제에 의한 한국 분단과 1950년 애치슨라인 선언에 의한 6.25 빌미 제공에 앞서 미국이 한국을 배반한 첫 사례다.
 
영국도 블라디보스토크로부터 러시아가 태평양에 진출하는 것을 저지할 전략적 목적으로 1885년 조선의 거문도를 불문곡직 점령했다. 영국군이 철수한 것은 1887년이다. 한반도는 제국주의 열강들의 세력균형을 위한 투쟁의 장이었다. 그때의 조선인들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힘이 없는 역사의 객체였다. 1896년 고종이 덕수궁에서 담 하나를 사이에 둔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한 아관파천은 세기 초 조선의 운명을 상징하는 희비극(tragicomedy)의 극치였다.
 
남북 주변 4강 정상 총출동 유례 없어
1세기 이상 지난 오늘, 남북한의 국제적 신분이 객체에서 주체로, 분단자/divider에서 연결자/connecter로 바뀔 수 있는 단군 이래의 기회를 맞았다. 이런 데 쓰라고 천재일우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유라시아 대륙과 태평양 사이의 단층선/fault line을 걷어내고 양대 세력의 소통로가 되는 역사적, 심지어는 문명사적 사명에 남북한 코리안들의 어깨가 무겁다. 한반도가 위치한 지리 조건의 대역전이다.
 
이달 27일 판문점 남측 평화의 집에서 열리는 남북 정상회담이 그 시작이다. 미·일 정상회담, 북·미 정상회담, 한·중·일 정상회담, 한·러 정상회담이 뒤따른다. 북·중 정상회담은 지난달 열렸다. 남북 정상회담에서 확인된 북한 비핵화의 의지를 건네받은 북·미 정상회담에서는 김정은과 트럼프 간에 비핵화에 관한 포괄적 합의나 개념적 선언이 나올 것으로 기대된다. 그래야 한다.
 
포괄적 합의에는 북한 비핵화에 대한 보상으로 북한체제의 안전을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가 포함된다. 북·미정 상회담에서 비핵화와 체제 안전의 보장을 교환하는 데 합의가 이루어지면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은 다시 만나 비핵화를 추동(推動)하고 동시에 남북관계를 개선하는 방안을 논의하는 2차 문·김 회담을 평양이나 판문점이나 남한의 어느 도시에서 개최할 계획이다. 비핵화를 포함한 한반도 평화정착의 역사적 사업은 한 번의 정상회담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북한 체제 안전보장의 핵심은 북·미 수교와 한·미·중 간에 체결될 평화협정이다. 핵심은 평화협정에 담을 내용이다. 북한은 한국에서 미국 전략자산의 철수와 재래식이나 핵무기에 의한 북한 공격을 중단하라고 요구할 것이다. 아직은 주한미군 철수 요구는 들어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체제의 안보는 렉스 전 틸러슨 국무장관이 이미 선언한 약속이어서 큰 걸림돌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걱정되는 것은 비핵화의 과정이다. 합의가 이행단계에서 파산된 실패의 경험이 많기 때문이다.
 
개념적 또는 포괄적 합의의 틀 안에서 비핵화를 논의할 때 북한과 미국 양쪽에서 새로운 요구가 나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비핵화의 단계가 많고 협상 기간이 길어질수록 그럴 가능성은 증가한다. 그래서 한국도 미국도 현 수준의 핵 프로그램과 핵무기 동결에서 검증 가능하고 되돌릴 수 없는 완전한 비핵화(CVID)의 전체 과정을 2020년 트럼프의 임기가 끝나기 전에 완료하기를 바란다. 트럼프가 재선되어 4년 더 대통령에 머물 수도 있지만 그런 불확실성은 정책의 기반이 될 수가 없다.
 
어떻게 비핵화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백가쟁명(百家爭鳴)으로 상상할 수 있는 방안이 모두 나와 있다. 문재인 대통령도 4월 12일 남북정상회담에 관한 원로자문단 회의에서 이제는 많이 나온 해법들을 추려서 정리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6개국+EU·유엔 회의서 평화협정 추인
1954년 한반도 전쟁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회담. 남북과 유엔군으로 참전한 미·영·프 등 15개국, 중·러가 참석했다. [중앙포토]

1954년 한반도 전쟁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회담. 남북과 유엔군으로 참전한 미·영·프 등 15개국, 중·러가 참석했다. [중앙포토]

비핵화의 방법은 단계적 타결이냐 일괄 원샷 타결이냐로 압축된다. 미국은 선 핵 폐기 후 보상을 전제로 한 일괄타결을 원하지만 김정은은 단계적, 동시적 해결을 원하기 때문에 이 선후 관계(sequence)에 관한 협상이 난항할 수 있다. 그러나 정상들이 합의한  포괄적 비핵화가 이행되는 것은 단계적일 수밖에 없음을 생각하면 북·미 간 입장 차이가 비핵화의 전망을 비관할 만큼 큰 것은 아니다. 안될 것이라는 비관으로는 아무것도 시작할 수가 없다. 미국과 북한 협상가들이 비핵화의 전체 프로세스를 너무 많은 단계로 분절하지 않는다는 데만 합의하면 거리는 크게 좁혀질 것이다. 단계가 많으면 말 대 말, 행동 대 행동을 단계마다 검증하면서 보상해 나가다 로드맵 전체가 무너진 과거의 실패를 되풀이 할 수가 있다.
 
김정은 위원장이 베이징 방문 때 말 한 “동시적”이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핵화에 대한 보상은 북·미 수교와 평화협정이다.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 하에 비핵화의 초기 조치를 취하여 미국이 북한의 비핵화 의지에 확신을 갖는 단계에서 두 나라는 국교 정상화를 선언하고 평양과 워싱턴에 각각의 연락사무소를 개설하면 협상의 수레바퀴는 후진할 수 없을 정도의 전진 탄력을 받을 것이다.
 
CVID가시야에 들어왔을 때 미국과 북한은 연락사무소를 대사관으로 승격하고 동시에 남북한과 미·중 4개국 정상들이 만나 한반도·동북아시아 정상회의를 연다. 거기서 김정은 위원장은 세계만방에 CVID를 선언하고 남북과 미·중 협상에서 합의된 방식으로 미국 전문가들의 기술 지원을 받아 핵무기와 물질, 화학무기와 미사일을 폐기하는 작업에 들어간다. 남북한과 미·중의 정상들은 한국전쟁의 종결을 공식 선언하고 휴전협정을 대체하는 평화협정을 체결한다. 러시아와 일본은 평화협정을 지지(endorse)하는 성명을 발표한다. 1954년 제네바에서 열린 한국 전쟁과 인도차이나 전쟁의 종식 이후를 논의하는 정치회의와 같은 6개국 플러스 유럽연합(EU)와 유엔이 참가하는 정상회의를 열어 평화협정을 국제적으로 추인받을 수도 있다.
 
제네바 정치회의에는 한국의 변영태 외무, 북한의 남일 외교, 미국의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 중국의 저우언라이 총리 겸 외무, 영국의 앤서니 이든 외무장관 등 당시 외교무대의 기라성들이 대거 참석했다. 그들은 그러나 정상들은 아니었다. 북한 비핵화와 평화협정을 국제적으로 추인하는 한반도 정치회의는 정상들의 회의가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4·27 남북 정상회담에서 평화협정을 축하하는 확대 정치회의까지는 길고 힘든 여정이다. 문재인 정부가 북한과 미국 사이의 이견을 조정하는데 국력을 소진할 각오로 외교적 노력을 쏟아붓지 않으면 해피 엔딩의 그 종착역에 이르지 못한다.
 
중재 노력은 창의적이고 상상력 넘치는 것이어야 한다. 안 된다, 어렵다는 틀을 깨고 나와야 한다. 독일 통일 과정에서 동방정책을 설계한 에곤 바는 참모들에게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라”(Think the unthinkable)고 끊임없이 재촉했다. 문재인 정부가 직면한 역사적인 도전은 현실주의에 기반한 재래식(conventional) 사고방식만으로는 감당하지 못한다. 한반도가 4강에 둘러싸여 있다는 지리적 운명론과 결정론을 벗어던져야 한다.
 
트럼프 타워 제안, 회담 윤활유 될 수도
몽상가(visionary)들의 기여를 기대한다. 몽상가는 꿈같은 비전(vision)을 무책임하게 던지는, 신기루를 좇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긴 눈으로 보면 역사는 몽상가들의 꿈에서 시작된다. 현실주의자들이 할 일은 몽상가들이 제시한 현실성 없어 보이는 비전을 현실에 맞게 가공하여 실현하는 것이다. 가령 대동강 변의 트럼프 타워를 상상해 보자. 트럼프는 부동산 개발업자다. 대통령직에 있으면서도 이해의 충돌 따위 고려하지 않고 딸과 사위를 시켜 사업을 계속한다. 판문점 정상회담에서 두 정상이 가벼운 환담을 나누는 시간이 있을 것이다. 그때 문재인 대통령이 웃으면서 “트럼프 대통령 만나시거든 좋은 땅 내어드릴 테니 평양의 여명거리나대동강 변에 트럼프 타워를 하나 세우시지요”라고 제안하기를 권한다. 김정은 위원장이 트럼프에게 그런 제안을 한다면 트럼프의 사업 본능이 촉발되어 얼굴이 환하게 밝아질 것이다. 실현되고 안 되고를 떠나 그런 제안은 회담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는 윤활유 역할을 한다. 트럼프 퇴임 후라도 자본주의 경제의 상징인 트럼프 타워가 평양 대동강 변에 떡 선다면 김정은의 북한에는 최고의 소프트 파워 바람막이가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대동강 변의 트럼프 타워는 미국 자본의 대북 투자의 인계철선도 될 것이다. 한반도 평화에 대한 몽상가의 많이 앞서가는 그림이다.
 
김영희 전 중앙일보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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