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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 남편 대신 묻는 말 "요즘은 나무 한차에 얼마예요?"

중앙일보 2018.04.15 06:02
[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3)

남편을 떠나 보내고 고택과 작은도서관을 관리하며 평범한 할머니로 지낸다. 지식은 책이나 그것을 갖춘 이에게서 배우는 것이지만, 인생살이 지혜를 배우는 건 누구든 상관없다는 지론을 편다. 경험에서 터득한 인생을 함께 나누고자 가슴 가득한 사랑·한·기쁨·즐거움·슬픔의 감정을 풀어내는 이야기를 쓴다. 과거는 억만금을 줘도 바꿀 수 없지만, 미래는 바꿀 수 있다는 말처럼 이웃과 함께 남은 인생을 멋지게 꾸며 살아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남편이 술에 취해 마음이 울적해지면 늘 하는 두 가지 이야기가 있었다. [사진 pixabay]

남편이 술에 취해 마음이 울적해지면 늘 하는 두 가지 이야기가 있었다. [사진 pixabay]

 
남편은 술에 취해 마음이 울적해지는 날이면 늘 하는 레퍼토리가 있었다. 하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장학생으로 중학교 입학식에 가는 날의 이야기다. 아침도 못 먹고 차비도 없고 부모도 새벽부터 어딜 갔는지 아무도 없어 (너무 미안해서 피하신 것) 쌈짓돈도 없는 가난한 할머니만 아이의 손을 잡고 울었다는 슬픈 이야기다. 두 번째는 10대 때부터 가족을 위해 소달구지로 나무장사를 해서 먹고 살아온 애틋한 인생사이다.
 
두 가지 이야기가 순서만 뒤바뀌어 몇 번 되풀이 되어도 애잔하고 위로 말고는 달리해줄 말이 없어 늘 "수고했어. 정말 장했어"라며 등만 토닥거려줬지만, 하루는 그 이야기 중 한 개라도 중단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보, 내가 말이야 학교 못 가 엄마 원망하는 그 이야기를 연구 분석해 봤어, 요즘 당신 사는 모습을 보면 큰일 할 사람이 맞는 거 같아. 사주에도 칼을 찼으면 장군이 됐다고 하잖아. 아니, 그런데 당신 인생이 정주영 회장이랑 비슷해. 너무 가난한 거나 가난해서 학교 못 간 거나. 근데 그때 당시 부모가 돈이 없었던 거지 학교 못 가게 손발을 묶어 놓은 건 아니잖아. 가정 사정을 잘 알았으니 꼭 가려고 마음먹었으면 새벽에 일어나 걸어가다가 차를 얻어 타고 가도 됐을 것이고, 이것도 아니면 그 어른같이 일단 가출해 내 인생을 만들어 봐야 했잖아…."
 
가난한 부모가 잘못이 아니라 가출을 못 한 당신 탓이다, 가출해야 말이 된다, 어쩌고저쩌고 미주알고주알…. 그날 남편은 크게 웃었고 원망의 트라우마로 숨어있던 첫 번째 이야기는 본인의 판단 잘못으로 인정하고 그렇게 중단했다.
 
학업 포기하고 나무 장사로 동생들 끼니 해결했던 남편  
가정형편이 너무 안 좋았던 남편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동생들을 위해 나무장사를 시작했다. [중앙포토]

가정형편이 너무 안 좋았던 남편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동생들을 위해 나무장사를 시작했다. [중앙포토]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정형편이 너무 안 좋아 동생들을 위해 학업을 포기하고 나무장사를 했다는 남편은 오후 해거름 길에 소달구지를 끌고 산에 올라가 힘들게 나무를 해와 이른 새벽에 시장에 내다 팔아 보리쌀과 바꿨다고 한다.
 
그러면서 돌아오는 아침 길목에서 교복을 입은 등굣길 친구를 피하려고 숨다가 물에 빠진 이야기랑 깡패를 만나 보리쌀을 다 빼앗겨 울며 돌아오던 이야기, 너무 피곤해서 졸다 보면 소가 혼자 집을 찾아 도착해 있더라는 이야기를 도돌이표같이 했다.
 
그럴 적마다 힘세고 용감하고 늠름한 남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는 엄마의 품이 그리운 열다섯 살 소년의 모습이 보여 안아주며 “그렇게 잘 살아와서 이렇게 이쁜 마누라 만났잖아"라며 또 위로했다.
 
삶이 너무 힘들어 해병대에 자원입대했는데 군대에서 밥 주고 옷 주고 돈도 줘서 그때가 제일 좋았단다. 너무 슬픈 이야기를 중단하기 위해 아무리 반전을 만들어 보려고 머리를 굴려도 이보다 더 가난한 이야기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 어느 날 우린 추억여행 차 해병대 사단이 있는 포항으로 여행을 갔다. 아직도 부대는 그 자리에 있었다. 일렬로 지나가는 군인의 모습에서 지난날이 생각나는지 흐뭇한 표정이었다.
 
그날 저녁 숙소를 잡아놓고 부대 앞 손님이 없는 선술집에서 술집 주인과 함께 이런저런 살아온 이야기를 했다. 나이도 같고 해병대를 나오고 지지리도 가난한 어린 시절도 똑같다.
 
해병대는 기수가 전부다. 군번을 복창하니 남편이 1년 후배였다. 술 한잔에 선배님, 후배님 하며 어찌나 말이 많은지. 남자들이 군대 이야기를 시작하면 끝나질 않으니 기다리지 말고 자자던 그의 부인과 함께 방에 들어가 드러누웠다.
 
너무 가난한 초등학교 시절을 거쳐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되어 집안의 생사를 책임졌던 선술 집 주인과 나무장사를 해 보리쌀로 가족을 먹여 살린 내 남편은 밤늦도록 목이 메가며 막상막하의 가난을 겨뤘다. 남편이 추운 겨울에 나무를 가득 싣고 시장까지 가 음식으로 바꾸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주인 남자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선술 집 주인과 막상막하의 어릴 적 가난 겨루기
“어이~ 후배! 고생이 아니고 자랑인데?” 하며 삐딱하게 고개를 들며 말했다.
“뭐가?”

“어이~ 후배! 자가용이 있었잖아. 나는 어깨가 빠지도록 몇 번을 날랐는지 네가 아나? 있었다고 자랑하는 거제? 짜식이~ 그래도 그때 소달구지만 있었어도 부자였어.”
 
그날 두 사람의 이야기를 방에서 듣다가 우린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그날 밤 여관을 얻어 놓고도 선술집 방에서 밤새 떠들다가 자고 일어나 고등엇국이란 것도 처음 맛보았다.
 
여행길에서 돌아와서는 그 가난했던 옛이야기가 어디로 숨었는지 그 이후로는 나오지 않았다. 행복의 기준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 가난함의 틈새에도 행복이 있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으니…. 그런 이야깃거리가 있을 만큼 추억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것이 아닐까.
 
나무와 남편의 추억  
나무를 실은 차만 보면 운전기사를 붙잡고 이것저것 물어보던 남편. 어느새 그 질문을 내가 하고 있다. [중앙포토]

나무를 실은 차만 보면 운전기사를 붙잡고 이것저것 물어보던 남편. 어느새 그 질문을 내가 하고 있다. [중앙포토]

 
우리 동네에서 가장 멋진 집에 들어갈 벽난로용 나무를 실은 차가 길 한쪽에 서서 지게차를 기다리고 있다. 옛날 같으면 가난한 집의 땔감이었던 것이 요즘은 부잣집 연료로 쓰이는 비싼 몸이다.
 
나무를 실은 차만 보면 운전기사를 붙잡고 요즘 나무 한차는 얼마인지, 어디서 해온 나무인지, 얼마나 말린 것인지 이것저것 물어보던 남편. 나무만 보면 어린 시절 이야기를 끄집어내 추억을 안주 삼아 술 한잔하던 남편은 이젠 없다.
 
도로 앞 나무를 실은 차를 바라보며 잠시 추억을 그리다 보니 어느새 운전기사를 붙잡고 내가 묻고 있었다. "요즘은 나무 한차에 얼마예요? 이 나무는 어디서 오는 거예요?"
 
송미옥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sesu323@hanmail.net
 

비트코인의 탄생과 정체를 파헤치는 세계 최초의 소설 '누가 사토시 나카모토를 죽였나' (http://news.joins.com/issueSeries/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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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미옥 송미옥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필진

[송미옥의 살다보면] 요양보호사 일을 하다 평범한 할머니로 지낸다. 지식은 책이나 그것을 갖춘 이에게서 배우는 것이지만, 인생살이 지혜를 배우는 건 누구든 상관없다는 지론을 편다. 경험에서 터득한 인생을 함께 나누고자 가슴 가득한 사랑·한·기쁨·즐거움·슬픔의 감정을 풀어내는 이야기를 쓴다. 과거는 억만금을 줘도 바꿀 수 없지만, 미래는 바꿀 수 있다는 말처럼 이웃과 함께 남은 인생을 멋지게 꾸며 살아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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