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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삶 찾고 5년 만에 새 생명을…심장 이식 환자, 국내 첫 출산

중앙일보 2018.04.03 12:54
심장 이식 환자로서 국내 첫 출산에 성공한 이은진 씨와 아들 오강현 군. [사진 서울아산병원]

심장 이식 환자로서 국내 첫 출산에 성공한 이은진 씨와 아들 오강현 군. [사진 서울아산병원]

지난 1월 9일, 만삭의 이은진(37ㆍ광주광역시)씨는 서울아산병원 분만실에서 아기를 낳았다. 몸무게 2.98kg의 건강한 아들. 새로 태어난 핏줄의 얼굴을 확인한 이 씨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5년 전만 해도 내 아이를 가질 수 있을지조차 불투명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이를 보자마자 눈물이 많이 나왔다. 내 아이라는 게 신기했다"고 말했다.
 

이은진 씨, 올 초 건강한 아들 낳아
확장성 심근병증 악화돼 심장 이식

유산·기형 위험 높지만 임신 의지
건강 관리로 순산 "아이에 고마워"

서울아산병원은 심장 이식 환자인 이씨가 꾸준한 노력 끝에 건강한 아들을 얻으면서 국내 첫 출산 성공 사례가 됐다고 3일 밝혔다. 신장ㆍ간 이식 환자의 출산은 몇 차례 나온 적 있지만 심장 이식 산모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 씨도 처음부터 심장에 문제가 있던 건 아니었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20대 여성이었다. 하지만 지역 병원에서 심장 근육에 이상이 생겨 심장이 비대해지는 '확장성 심근병증' 진단을 받으면서 삶이 완전히 달라졌다. 꾸준히 치료를 받으며 투병 생활을 이어가다 상태가 악화하면서 이식밖에 답이 없었다. 다행히 기증자가 나타나면서 2013년 3월 서울아산병원에서 심장 이식 수술을 받고 새 삶을 찾았다.
 
이 씨는 수술 이후 꾸준히 면역 억제제를 쓰고 운동을 하면서 건강을 유지했다. 그리고 2016년 평생의 반려자를 찾았고, 임신을 꿈꾸게 됐다. 하지만 남편과 시어머니ㆍ시아버지는 이 씨의 건강을 걱정해서 처음엔 적극 만류했다. 
 
실제로 의료계에선 심장 이식 환자는 조산과 유산의 가능성이 높아 임신이 어렵다고 알려져 있다. 복부에 있는 간ㆍ신장과 달리 흉부에 있는 장기라서 임신하면 선천성 태아 기형이나 자연 유산 확률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해외 연구가 여럿 발표됐다. 임신 후 유산한 사례도 많이 나왔다.
 
하지만 '엄마가 되고 싶다'는 이은진 씨의 뜻은 꺾이지 않았다. 같은 심장 이식 환자인 친정어머니 김순덕씨의 전폭적인 지지도 임신 결정에 큰 힘이 됐다. 김씨도 딸이 앓은 확장성 심근병증 때문에 2014년 이식 수술을 받았다.
심장 이식 환자로서 국내 첫 출산에 성공한 이은진씨와 그 가족. [사진 서울아산병원]

심장 이식 환자로서 국내 첫 출산에 성공한 이은진씨와 그 가족. [사진 서울아산병원]

결국 그는 지난해 3월 아이를 갖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자칫 아이와 산모 모두 위험할 수 있어 건강 관리에 더 신경을 썼다. 임신 중에도 자주 병원을 찾아 심장 기능 이상이나 거부 반응이 생기는지 챙기고 고혈압ㆍ당뇨 등의 부작용을 수시로 확인했다. 아이 기형을 유발할 수 있는 면역 억제제 성분도 조절했다. 체중도 크게 늘지 않았고 건강에도 크게 문제가 없었다.
 
출산을 앞둔 올 1월 초, 서울아산병원 마취과에선 이식 수술력을 이유로 전신 마취 후 제왕절개를 권유했다. 하지만 전신 마취를 통한 제왕절개는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을 볼 수 없다는 문제가 있었다. 이 씨의 심장 관리를 맡아온 김재중 서울아산병원 심장내과 교수가 척추 마취를 해도 될 거 같다고 마취과를 설득했다. "어렵게 생긴 새 생명이 탄생하는 기쁨을 마음껏 누리게 하자"는 배려가 담겼다. 
 
그렇게 이 씨는 분만실에서 막 태어난 건강한 아이를 품에 안을 수 있었다. 특히 손주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친정 아버지가 펑펑 눈물을 흘렸다. 딸이 이식 수술을 받고 힘들 때 옆에서 간호하던 사람이 바로 그였다. 이씨는 "아버지에게 특히 고맙고 죄송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현재 엄마와 아이 모두 매우 건강한 상태다. 아들 오강현 군은 생후 100일을 앞두고 있다. 이 씨는 "아무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심장 이식 환자의 임신과 출산이었지만 의료진에 대한 굳은 믿음이 있어서 두렵지 않았다. 건강하게 태어나 준 아이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심장 이식 환자로서 국내 첫 출산에 성공한 이은진 씨와 친정 부모. [사진 서울아산병원]

심장 이식 환자로서 국내 첫 출산에 성공한 이은진 씨와 친정 부모. [사진 서울아산병원]

이 씨처럼 심장 이식을 받은 국내가임 여성은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2000년 이후 1391건(올 3월까지)의 심장 이식이 이뤄졌고, 이 중 32%가 여성이었다. 또한 여성 이식 환자 3명 중 1명은 가임기로 추정된다. 심장이 나빠진 상태에선 정상적인 임신 유지가 어렵다. 하지만 이식 후 1년 이상이 지나고 건강이 회복됐다면 담당 의사와 충분한 상의를 거쳐 임신 시도를 결정할 수 있다. 
 
임신 후에도 이식된 심장이 제대로 움직이는지와 감염, 임신중독증, 당뇨병 여부 등을 정기적으로 확인해야 한다. 이러한 조건들이 모두 맞아떨어질 때만 자연분만 혹은 제왕절개로 분만할 수 있다. 이씨가 첫 사례이지만, 앞으로도 더 많은 심장 이식 환자들이 새로운 생명과 마주할 수 있다는 의미다.
 
김재중 교수는 "심장을 이식받은 가임기 환자들이 새 희망을 갖게 돼서 기쁘게 생각한다. 심장 이식 환자가 임신을 시도할 때는 면역 억제제를 줄여야 하므로 적절한 혈중 약물 농도를 유지하고 주기적인 심장 검사를 받는 등 의료진 관리가 필수적이다"고 강조했다. 이은진 씨는 "나와 같은 심장 이식 환자들이 엄마가 되는 기쁨을 더 많이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정종훈 기자 sakeh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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