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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국 칼럼] 박정희 동상과 관용의 정치

중앙일보 2018.04.02 01:28 종합 31면 지면보기
김진국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김진국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1978년 7월 6일. 장충체육관에서 제9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박정희 대통령은 유효투표 100% 지지로 선출됐다. 유신헌법은 통일주체국민회의가 대통령을 뽑게 돼 있었다. 출마는 그 회의 의장인 박정희 한 사람. 2581명의 대의원 가운데 2578명이 참석해 2577명이 ‘박정희’라고 썼다. 한자를 잘못 쓴 한 표만 무효가 됐다. 대학생이었던 나는 그날 밥을 넘길 수가 없었다.
 

살아 있는 노무현 봉하마을과
한산한 박정희 생가 대조적
공인의 삶 다 비판받을 수 없고
어두운 부분도 역사의 한 대목
동상 까다롭게 심의해야 하지만
기념관 내 동상까지 막아서야

72년 똑같은 방식으로 100% 표를 모아 당선된 뒤 6년 임기를 마친 후다. 그때도 무효표 한 장 외에는 모두 박정희 후보 표였다. 북한 선거에서나 보았던 상상할 수 없는 투표-. 2학기가 개학하자 긴급조치 속에서도 유신 철폐를 외치는 학내 시위가 일어났다. 나도 처음 ‘닭장차’를 타보고, 경찰서 유치장 신세를 졌다.
 
그런 기억 때문일까. 지난 연말 이전에는 박정희 생가에 가본 적이 없다. 경북 구미에 있는 생가는 한산했다. 기념품 가게에는 60년대에 찍어낸 듯한 책자 몇 가지만 보였다. 홍보영상은 ‘대한뉘우스’ 냄새가 났다. 바로 옆에 경북지사가 의욕적으로 터를 잡아놓은 새마을 테마공원 공사장에서는 경북도와 구미시, 중앙정부가 서로 떠넘기는 바람에 품삯조차 제때 주지 않는다는 인부의 푸념을 들었다.
 
그에 비하면 김해 봉하마을은 살아 있었다. 호남 등 전국에서 온 관광버스·승합차가 보였다. 기념품 가게에는 최근 발행한 다양하고 산뜻한 책, 눈길을 끄는 디자인의 기념품들이 가득했다. 1만5000개의 바닥 돌(박석·薄石)이 상징하듯 개인 후원이 밀려든다. 창경궁 옆 노무현센터도 곧 착공한다. 산업화 세대, 기득권 세력이라는 보수진영 전직 대통령 기념관들이 운영비가 없어 허덕이는 것과 대조적이다.
 
더구나 봉하마을은 모든 게 상징으로 다시 태어났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가의 바람개비, 부엉이바위, 박석 묘역, 노무현 전 대통령이 손주를 태우고 자전거를 달리던 유기농 들판, 심지어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평민당이 상징색으로 썼던 노란색까지 노무현의 상징이 됐다.
 
김진국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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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이렇게 바뀌나. 박정희 동상은 갈 곳이 없다. 지난해는 박 전 대통령이 태어난 지 100년. 기념재단이 광화문에 동상을 세우려 했다. 당연히 서울시가 반대했다. 대체 부지로 용산 전쟁기념관을 두드렸다. 그 역시 손을 저었다. 결국 마포 상암동에 있는 ‘박정희기념관’ 안에 세우기로 했다. 하지만 그것마저 가로막혀 동상이 창고에 갇혀 있다.
 
민족문제연구소와 마포 시민단체 등이 시위를 벌였다. 서울시는 서울시 부지에 세우는 동상이라 공공미술위원회 심의를 거쳐야 한다고 제동을 걸었다. 공공미술위원회는 역사자문기관 세 곳의 자문을 받아오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더불어민주당의 이 지역 오경환 시의원이 소개해 동상 건립 반대 청원을 접수했다. 박 전 대통령이 친일·독재자이고, 이 지역에 연고가 없다고 주장한다.
 
상암동 박정희기념관은 DJ가 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약속해 추진됐다. 우여곡절 끝에 2012년 겨우 문을 열었다. DJ는 박 전 대통령과 화해했다. 정치적 탄압을 받은 자신만이 용서할 수 있다고 했다. 99년 대구를 방문해 신현확 전 총리 등을 만나 그런 생각을 털어놨다.
 
“공인의 삶은 전부 다 박수받거나 전부 다 비판받을 순 없다. 박 대통령은 6·25 이후 실의에 빠진 국민에게 ‘우리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국민을 그렇게 만든 공로는 참으로 지대하다. 근대화를 이룬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이제 박 대통령은 역사에서 존경받는 지도자라고 국민에게 알려져야 한다.”
 
구미 박정희 동상 옆에는 2014년 경북·전남 국회의원 모임인 동서화합포럼에서 심은 기념식수가 있다. ‘국민 대통합의 염원을 담아’라는 글자와 이낙연 총리를 비롯해 박지원 민주평화당 의원 등 전남 의원 10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박 전 대통령의 역사에 분명히 어두운 부분이 있다. 그 한 부분은 필자도 경험했다. 하지만 DJ의 지적처럼 전부 다 비판받을 순 없다. 우리 역사에서 그 시대를 모두 잘라낼 수도 없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정권’이라고 부인하면 오늘의 우리 정체성을 부수는 꼴이다.
 
광화문은 모든 사람에게 공개된 곳이다. 논란 속에 동상을 세워 국론을 분열시킨다면 득보다 실이 클 수도 있다. 서울시가 공공미술위원회를 통해 심의하려는 건 그런 뜻일 것이다. 주변 경관을 해치는 지나치게 큰 동상에 불쾌했던 기억도 있다. 정말 제대로 관리해주면 좋겠다. 그렇지만 박정희기념관은 박정희라는 인물을 기념하는 곳이다. 그곳에마저 동상을 세울 수 없다는 건 지나치지 않은가. DJ의 화해와 관용의 정신이 새삼 아쉽다.
 
김진국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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