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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2035] 페미니스트는 해치지 않아요

중앙일보 2018.03.28 01:31 종합 32면 지면보기
홍상지 사회부 기자

홍상지 사회부 기자

남자 A에게는 깊이 사랑하는 여자가 한명 있었다. 어느 날 여자는 A에게 책을 한 권 선물했다. 미국 작가 록산 게이의 『나쁜 페미니스트』였다. “지금의 나를 만든 책이라 당신도 읽어봤으면 좋겠어.” 여자가 말했다.
 
A는 충격에 휩싸였다. ‘사랑스러운 내 여인이 페미니스트였다니!’ A의 머릿속에는 ‘별것도 아닌 일에 성차별이라며 자신의 권리만 주장하는, 남자를 잠재적 성범죄자 취급하는 여성 우월주의자’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성차별? 경제적 부담이나 힘쓰는 건 늘 남자한테 떠넘기면서?’ 속으로 화가 치민 A가 여자에게 말했다. “난 우리 집안에 페미니스트가 들어올 거라곤 상상도 해본 적 없어!”
 
얼마 전 들은 실화다. 연인은 결국 이별했다.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스트가 뭐길래 A는 그토록 사랑하던 여자를 ‘가문의 원수’인 양 혐오하게 된 걸까. 실제로 여자 아이돌이 책 『82년생 김지영』을 봤다는 이유로, ‘Girls can do anything’ 문구가 적힌 폰케이스를 했다는 이유로 ‘너도 페미냐?’는 악성 댓글에 시달리는 게 현실이다. 정상은 아니다.
 
트위터에는 ‘미투·페미니즘·남성차별을 미러링 한다’는 ‘유투’ 계정까지 생겼다. ‘우리 사회에는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처럼 여성혐오만 있는 게 아니라, 남성혐오·남성차별도 심각하다’는 취지다. 심정은 알겠으나 동의하지 않는다. 각각의 혐오가 벌어진 사회적 맥락에 비춰봤을 때 여성이 겪는 일상의 혐오와 남성혐오는 동일 선상에 놓일 수 없다. 이를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과 교수는 책 『말이 칼이 될 때』에서 “나도 남성이라 남성 비하 발언을 들으면 기분이 좋지 않다. 하지만 남성에 대한 차별적·모욕적 표현이 난무한다고 해서 내가 차별과 성폭력의 피해자가 될 것을 걱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여성혐오는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차별하는 것을 넘어 일상적인 공포를 불러온다”고 설명했다.
 
게다가 남성들이 말하는 역차별의 바탕에는 가부장제가 남긴 뿌리 깊은 성차별이 있다. 남녀의 역할이 바깥사람과 안 사람으로 구분돼 여자가 남자한테 사회·경제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던 과거의 잔재를 바꾸자는 게 페미니즘이다. 오히려 여성이 성 구분 없이 온전한 주체성을 가진다면 남성들이 주장하는 ‘가장으로서의 부담’도 덜 수 있다.
 
결론은 페미니스트를 지금처럼 비정상적으로 혐오할 이유가 없다는 거다. 혐오할 시간에 책이라도 한 번 읽어보시길 권한다. 페미니스트는 별종이 아니다. 어쩌면 당신이 가장 잘 아는 연인이나 가족, 친구일 수 있다. 페미니스트는 여러분을 해치지 않는다.
 
홍상지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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