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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기의 시시각각] 사람을 잡을까, 사회를 바꿀까

중앙일보 2018.03.28 01:22 종합 34면 지면보기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마치 광화문을 옮겨 놓은 듯했다. 지난 24일 워싱턴 DC 의사당 주변의 광경과 외침은 그랬다.
 

끝을 봐야 끝나고, 끝내는 기형적 사회
보복과 복수는 국민에게도 습관화된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젊은 엄마·아빠, 삼삼오오 손팻말을 든 채 전국에서 몰려든 학생들, 이들의 목소리에 호응하는 유명 연예인들의 공연…, 서로가 얼싸안고 눈물과 웃음을 함께하는 모습도 흡사했다. 총기 규제를 요구하는 군중은 의회에서 백악관을 잇는 2.5㎞ 펜실베이니아 애비뉴 길을 가득 메웠다. 춥고 배고픈 어린 학생들을 응원하기 위해 워싱턴 14번가의 ‘더 피그’, 11번가의 ‘더 버드’ 식당은 무료로 바나나와 음료를 제공했다. 쉐이크쉑 버거 등 주변 10여 곳의 가게는 반값에 음식을 내놓았다. 미국에서 이런 모습을 보긴 처음이었다.
 
또 하나의 감동. 55년 전인 1963년 당시 34세의 마틴 루서 킹 목사가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로 시작하는 연설을 했던 곳에는 킹 목사의 9살짜리 손녀가 섰다. “우리 할아버지에겐 꿈이 있었습니다. 어린 네 자녀가 피부색이 아닌 각자의 인격으로 평가받는 나라에 살게 되리라는 꿈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총기 폭력이 없는 세상입니다.” 간결하지만, 정곡을 찔렀다.
 
하지만 ‘이질감’도 있었다. 워싱턴 시위에는 ‘타깃’이 없었다. 공동의 적이 없었다. 총기 규제에 필요한 시스템, 그리고 제도 변화를 촉구할 뿐이었다. 워싱턴을 비우고 골프를 치러 간 트럼프 대통령을 도마에 올릴 법도 했지만 트럼프의 ‘트’자조차 들리지 않았다. 백악관 항의 행진 같은 것도 없었다. 관심과 초점이 ‘사람의 변화’가 아닌 ‘사회의 변화’였다.
 
나라마다 역사와 문화가 다르니 시위도 다를 게다. 하지만 미국의 힘은 이런 사회적 건전성에서 비롯됨을 느낀다. 비단 이날 시위뿐이 아니다. 미국에서 시작된 ‘미투 고발’도 가해자를 망신 주고 여론재판을 하는 식의 양상은 찾아보기 힘들다. 잘못한 걸 벌주는 건 ‘법’의 몫이다. 본질의 개선, 즉 미래에 초점이 있다. 마녀사냥식 보도도 없다. 자살까지 가야 끝이 나는 문화도 없다. 정치적 현안을 다루는 방식도 마찬가지. 수사기관의 편의적 리크(정보 유출)는 없다. 정권이 바뀌어도 그렇다. 그러니 국민은 믿는다. 그저 다양한 토론과 논쟁, 공정한 법 집행과 재판, 그리고 필요한 법 개정이 물 흐르듯 이뤄진다.
 
이명박의 구속, 조민기의 자살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던질까.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는 건 당연하다. 기본 전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 모두 너무 극단을 자연시, 혹은 당연시하는 사회를 스스로 만들어 가고 있는 건 아닐까.
 
끝장 토론, 끝장 파업, 끝장 승부…. 우리 모두 일상사에서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게 된 단어들이다. 그러다 보니 “혐의가 사실이라면 동대구역에서 할복 자살하겠다” “손에 장을 지지겠다”와 같은 극단적인 정치적 언사가 난무한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아무도 이를 어색하게 느끼지 않는다. 그러려니 한다. 말한 사람도, 듣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끝을 봐야 끝내는, 끝을 봐야 끝나는 그런 나라가 됐다. 참으로 기형적 사회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다음이다. 끝을 보려는 사회에선 결국 그 화살촉이 ‘사람’으로 향하게 돼 있다. 썩은 물을 갈기보다 시꺼먼 물고기를 잡아 제거하는 식이다. 새로 집어넣은 깨끗한 물고기? 물을 휘젓고 다니다 보면 곧 더러워질 수밖에 없다. 또 물고기 탓이 된다. 또 제거된다. 어긋난 복수와 보복은 정권뿐 아니라 국민에게도 습관화된다.
 
사회를 바꿀 것이냐, 사람을 잡을 것이냐. 그 근원적인 질문의 답은 결국 우리 마음속에 있다.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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