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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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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lee.youngjong@joongang.co.kr

“남조선으로 유학 왔습네다” … 진화하는 탈북

중앙일보 2018.03.28 00:03 종합 28면 지면보기
[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탈북은 목숨을 건 결단이다. 폭압적 세습통치의 사슬을 끊어내려는 몸짓이지만 실패할 경우 가혹한 징벌이 가해진다. 중국 등지를 떠돌다 강제 북송당할 경우 고초는 더하다. ‘조국’을 배신했다는 꼬리표가 붙고, 목숨을 부지한다 해도 ‘정치적 생명’은 끝나 버린다. 가족과 친지에게도 화가 미친다. 그런데도 탈북 행렬은 끊이지 않고 있다.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만 3만 1000명을 넘어섰다. 북한 인구(2490만명)를 감안하면 800명 가운데 한 명꼴이다. 최근 들어서는 탈북 패턴에 흥미로운 변화도 나타나고 있다.

브로커 주선으로 곧장 한국행
북한 부모가 달러 송금하기도

‘내 자식만은 서울에서 교육’
지방 당 간부와 ‘돈주’가 주도

엘리트 한국행도 자녀들 때문
탈북자 감소 속 의미있는 변화

 
 
서울 소재 한 대학에 다니는 A씨(23·여)는 특이한 ‘탈북자’다. 2년 전 홀로 고향인 양강도의 한 도시를 떠나 곧바로 한국행에 성공했다. 중국과 동남아를 수년 동안 전전하다 가까스로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는 대부분의 경우와 다르다. 적지 않은 브로커 비용이 들었다. 정착금 700만원과 주거 지원금 1300만원(이상 1인 기준)을 받았는데, 그 뒤 별다른 일을 하지 않고도 비교적 여유로운 생활을 해왔다. A씨의 옷차림이나 헤어스타일은 서울의 여느 대학생과 다르지 않다. 무엇보다 말투가 거의 한국 표준말에 가까워 학교 친구들조차 탈북자인 걸 알아채지 못한다고 한다. 한국에서 태어나 자란 또래 남학생과 깊이 사귀고 있다.
 
놀라운 건 A씨가 고향 부모로부터 주기적으로 달러를 송금받아 생활비와 용돈으로 쓰고 있다는 점이다. 아르바이트에 쫓기지 않고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비결이다. 부모와 가끔 전화통화도 한다. 주로 돈을 전달해주는 브로커가 중국 핸드폰을 몰래 반입해 북·중 접경지역에서 통화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A씨는 “지난해 여름엔 중국 동북 지방으로 나가 어머니와 몰래 상봉하고 왔다”고 털어놨다. 탈북자 출신 1호 박사인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은 “최근 단신 입국하는 청년 세대를 중심으로 이른바 ‘유학형 탈북’이 급격히 늘고 있다”며 “북한에 있는 부모가 생활비를 대주기 위해 역송금하는 현상도 빈번해지는 추세”라고 말했다.
 
유학형 탈북은 대체로 북한 지방 도시에서 권세를 휘두를 수 있는 노동당이나 권력기관 간부 사이에 은밀하게 번지고 있다. 장마당에서 상품유통과 거래로 막대한 돈을 챙긴 이른바 ‘돈주’ 세력도 가세하는 추세라고 한다. 이들이 20살 안팎의 자녀를 한국에 보내는 건 ‘미래를 향한 교육 투자’라는 생각에서다. 폐쇄적 북한 체제에서 체제 우상화나 주체사상 교육만 받고 자라서는 앞날이 없다는 판단이다. 탈북자 정책을 담당했던 통일부 당국자는 “중국과의 접경지역에서는 바깥 물정에 눈뜬 주민들이 적지 않고, 통일이 대비해 내 아들·딸 만큼은 인재로 준비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매우 강한 듯하다”고 말했다. 장사나 뇌물 등으로 달러를 넉넉하게 챙길 수 있게 된 경우 자연스레 관심을 갖게 된다는 얘기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nugu@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nugu@joongang.co.kr]

탈북형 유학의 뿌리에는 부모의 교육열이 자리하고 있다. ‘내 아이만큼은 제대로 공부시켜야겠다’는 열망은 북한에서도 어머니들의 치맛바람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탈북자 정착을 돕는 부산하나센터 강동완(동아대 교수) 센터장은 “한 탈북 여성의 경우 부산 지역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반에서 1등을 하는 걸 자랑하며 ‘한국에 오길 정말 잘했다’고 몇 번을 말하곤 한다”고 귀띔했다. 강 센터장은 “그 어머니는 북한에 있을 때 토끼 가죽 모아오는 방학과제가 떨어지면 장마당에서 돈을 주고 사서라도 할당량의 몇 배를 제출해 점수를 땄다고 한다”고 전했다.
 
해외에 근무하는 북한 엘리트 외교관이나 상사 주재원들도 자녀의 교육과 미래를 위한 탈북·망명에 나서고 있다. 런던 주재 북한 대사관에서 근무하다 2016년 7월 한국행을 택한 태영호 공사가 대표적이다. 국제학교를 거쳐 현지 명문대에 진학을 하게 된 아들에겐 서방세계의 자유를 만끽하며 글로벌 인재로 성장할 길이 열려 있었다. 다시 평양으로 돌아간다는 건 이런 기회와의 완전한 단절이다.
 
비슷한 시기 한국에 도착한 북한 수학 천재 이정열 군의 경우는 홀로 망명길에 나섰다. 당시 18살인 이 군은 홍콩에서 열린 제57회 국제수학올림피아드에 참가했다가 한국 총영사관에 뛰어들었다. 이 군은 홍콩에 오기 전 강원도에 있는 고향에 들러 아버지에게 탈북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중학교 수학 교사인 부친은 “우리 걱정은 말라”며 200달러를 손에 쥐여주었다고 한다. 남은 가족에게 닥칠 고초보다는 아들의 미래를 위해 만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북정보 관계자는 “비공개로 망명해 서울에 온 북한 고위 외교관·주재원 등이 수십 명 규모”라며 “이들 중 상당수는 ‘북에서도 사는 데 문제가 없지만, 아이들의 교육 때문에 왔다’고 말한다”고 전했다.
 
한국에 온 엘리트 탈북 인사들의 경우 일정 기간 경과 후 자녀를 미국 등으로 유학 보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일반 탈북자의 경우 아예 아이들 교육을 위해 영국이나 캐나다 같은 곳으로 재차 망명하기도 한다. 한국 국적을 취득하고 주택·지원금을 받았던 사실을 숨긴 채 ‘탈북자’ 신분으로 망명을 신청한다. 통일부 당국자는 “한국 정착 후 재망명하는 사례를 막기 위해 해당국과의 정보 공조를 강화했다”면서 “망명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불법 체류자가 되거나 한국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6·25전쟁 종전 이후 1980년대까지 탈북은 주로 휴전선을 통해 군인과 접경지역 주민이 넘어오는 방식이었다. 숫자도 적어 1989년까지 누계가 607명에 불과했다. ‘월남 귀순 용사’로 불리며 예우를 받은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하지만 1990년대 들어 소련 및 동구권 붕괴 등으로 해외 유학생과 엘리트 계층의 탈북이 이어졌다. 김일성 사망(1994년) 이후 이른바 ‘고난의 행군’으로 불린 경제난을 겪으며 탈북자는 급증세를 보였다. 정치적 이유보다는 식량난 해결이 주된 이유였다. 2009년 한 해 국내 정착 탈북자는 2914명을 기록해 정점을 찍었다. 이후 김정은 체제 들어 경제난이 다소 풀리고, 탈북 단속도 강화되면서 감소세를 보여 매년 1100~1500명 수준을 보인다. ‘유학형 탈북’은 이런 추세 속에서 새로운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알려왔습니다=3월21일자 24면 ‘남북 정상회담과 거짓말…’ 제하의 기사와 관련, 임동원 전 국정원장은 “(김일성 시신 참배를 요구하던) 김정일 위원장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안 가셔도 된다’고 말한 건 2000년 6월 13일 평양 도착 직후가 아니라 이튿날 만찬장으로 가는 차 안에서였다”고 이메일로 알려왔습니다. 임 전 원장은 또 “만찬장에서 김 위원장이 나를 불러 이런 사실을 알려줬으며, (김정일과의 귀엣말은 국정원장으로서 부적절한 처신이란 논란과 관련) 서울 귀환 후 거짓 해명을 한 바 없다”고 덧붙였습니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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