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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탁의 유레카, 유럽] 영국 브렉시트 부메랑, 이민자 떠나자 농촌 과일 썩어간다

중앙일보 2018.03.26 00:38 종합 21면 지면보기
“채소나 과일 농장을 운영하는 이들은 올해 수확기를 어떻게 넘길지 벌써 걱정입니다. 많은 농장이 잘 익은 과일 등을 딸 일손이 없어 썩게 놔둬야 했는데, 대형 슈퍼마켓 고객들이 신용도를 떨어뜨릴까 봐 쉬쉬하고 있을 뿐이에요.”
 

반이민 정서 직격탄 맞은 농업

영국 채소·과일 농업 관계자의 절반가량이 속해 있는 전국농업노조(NFU)의 앨리슨 케이퍼 원예이사회 의장은 지난해 자신의 사과 농장에서 큰 통 100개 분량의 사과를 제때 따지 못했다. 너무 익어 주스 공장에 보내는 바람에 3만 파운드(약 4500만원)의 손실을 봤다.
 
영국 농장 인력 99% 동유럽 출신 
 
영국 농장에서 노동자들이 호박을 따고 있다. 동유럽 노동자들이 줄어들면서 영국에선 제때 따지 못한 채소·과일 등이 썩는 일이 빚어지고 있다. [NFU사이트]

영국 농장에서 노동자들이 호박을 따고 있다. 동유럽 노동자들이 줄어들면서 영국에선 제때 따지 못한 채소·과일 등이 썩는 일이 빚어지고 있다. [NFU사이트]

최근 조사 결과 지난해 9월 등 수확기를 맞아 농장들이 고용한 임시 인력의 99% 이상은 동유럽에서 온 이들이었다. 영국인은 0.6%에 불과했다고 가디언은 전했다. 해당 기간 전국적으로 4300개 가량의 일자리가 채워지지 못했다.
 
2016년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국민투표 가결 이후 외국인 노동자들 사이에서 영국이 외국인을 혐오하며 인종 차별을 할 것이라는 인식이 퍼진 것이 한 원인이라고 NFU 측은 보고 있다. 해외 노동력의 ‘영국 기피’ 현상이 생긴 것이다. 영국에서 일했다가 이듬해 다시 찾아오는 비율은 2016년 41%에서 지난해 29%로 줄었다. 영국 통계청에 따르면 2016년 6월부터 지난해 6월까지 EU에서 영국으로 이주한 인원은 10만 명으로 줄어, 4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들 이민자가 없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주는 도시가 있다. 잉글랜드 북부 해로게이트다.
 
인구가 7만5000명인 해로게이트는 좋은 학교와 예쁜 빅토리아식 주택들이 있고 인근 대도시와 근접성도 뛰어나 영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뽑히곤 했다. 2004년 이후 이 도시로 유입된 유럽인은 연간 200명 수준에서 800명 수준으로 급증했다. 현재 인구 10명 중 한 명이 외국 태생이다. 이 마을을 찾아온 이들의 상당수는 폴란드인이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이민자의 수가 줄고 있다.
 
이민자들이 떠나면서 해로게이트의 노동 시장은 타격을 입었다. 시내 중심가의 상점들은 구직 안내문을 내걸었고, 마을 요양원도 일손이 달리는 상태다.
 
폴란드인 빠지자 웨이터도 구인난 
 
직원 구하기 경쟁이 치열한 해로게이트 상가.

직원 구하기 경쟁이 치열한 해로게이트 상가.

고급 레스토랑이 문을 열면서 다른 피자집 등에서 일하던 인력 100명을 데려가자 다른 점포들이 영업에 차질을 빚는 지경이다. 이 지역 실업률은 전국 평균보다 낮아 노는 일손이 별로 없기 때문에 업주들은 최저 임금을 올려서라도 뽑으려 하고 있다.
 
해로게이트는 이민자 의존도가 특히 높은 도시였다. 온천지대라 요양원 등 복지서비스 기관이 많고 소매업에 의존하는 지역이지만 마을 자체 노동력은 부족했기 때문이다. 리서치 회사인 레이버 인사이트의 자료에 따르면 해로게이트에서 이 같은 서비스 산업(Hospitality Industry) 관련 일자리 광고가 2016년 771건에서 지난해 1119건으로 증가했다.
 
해로게이트에서 폴란드 식품점을 운영하는 조아나 슬루자스키는 “일부 이민자들은 브렉시트 투표 이후 주민들이 반기지 않는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동네 놀이터에서 일부 영국 아이들이 동유럽 아이들을 괴롭히는 현상도 나타났다.
 
이민자들의 빈자리는 지역 주택시장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현지 부동산 중개인인 사이먼 크로프트는 “싼 임대 주택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면서 이런 주택의 가격 상승률이 전국 평균과 비교하면 절반에 불과하다”고 우려했다. 그는 “여기에 살던 폴란드인들은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독일이나 프랑스로 간 것 같다”며 “주소가 그쪽으로 옮겨졌다”고 전했다.
 
일손이 달리자 일부 기업은 적응할 아이디어를 짜내고 있다. 지역에서 호텔을 운영하는 사이먼 코튼은 침대 옆 탁자와 화장실 가구 등을 바닥에 놓지 않고 벽에 붙이는 공사를 했다. 바닥 청소를 더 빨리할 수 있게 해 청소 직원을 줄이기 위해서다. 산업용 식기세척기를 도입해 주방 설거지 인력의 공백을 메울 생각도 하고 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10대 인력으로 눈을 돌리는 업체들도 나타났다. 이 지역 10대들에게 국가가 정한 최저임금보다 더 많이 주겠다며 끌어들이려 하는 것이다. 해로게이트 의회의 매튜 로버츠는 “앞으로는 나이가 많은 고령자도 뽑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지 초등학교에서 소수 이민자의 상담 업무를 맡는 교사 모이아 우드는 이코노미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이민자들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지 모르고 있던 주민들이 조만간 깨닫게 될 것”이라며 “다른 지역 영국인들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런던에서 동쪽으로 2시간 반가량 떨어진 셋포드도 마찬가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지난 15년 동안 폴란드를 중심으로 동유럽에서 8000명이 이주해 와 정착하면서 이 도시의 인구는 2만7000명 가량 늘었다. 하지만 브렉시트 투표 이후 파운드화 약세까지 겹치면서 이민자들이 빠져나가고 있다.
 
12세기 수도원 유적과 박물관, 골프 코스를 가진 이 지역은 그림 같은 영국 마을로 꼽혔다. 이민 규모가 너무 빨리 늘어난다고 우려한 주민들은 브렉시트 찬성에 더 많은 표를 던졌다. 지역 경찰청에서 일하는 폴 위틀리는 블룸버그에 “증오 범죄를 야기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는 없지만 병원진료가 어려워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민자 얼마나 많은 일 했나 깨달아” 
 
폴란드 주민협회 회장이자 구의원을 맡고 있는 빅토르 루카니우크는 “동유럽 사람들이 대규모로 도시를 떠나기로 결정하면 지역 사업체들은 심각한 타격을 받을 것”이라며 “저렴하게 일하는 폴란드 노동자가 영국인이 싫어하는 일을 하며 영국을 유지해 왔다”고 말했다.
 
“그들이 나가면 누가 채소를 뽑을 건가요? 브렉시트는 이 나라가 저지른 가장 큰 실수입니다.” 루카니우크의 주장은 이민자를 싫어하지만 그 이민자가 사라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경험하지 못한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경고다.
 
김성탁 런던 특파원 sunt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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