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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 소년 대장이 흘린 피, 메이지 유신의 씨앗이 되다

중앙선데이 2018.03.24 01:00 576호 28면 지면보기
[장상인의 일본 탐구] 일본 최초 무장봉기 이끈 아마쿠사 시로
아마쿠사 시로의 모습을 재현한 영상. [사진 장상인]

아마쿠사 시로의 모습을 재현한 영상. [사진 장상인]

일본 규슈의 구마모토(熊本)현 서쪽에 아마쿠사(天草) 제도가 있다. 일본 전체로 보면 8위의 섬으로 면적 1000㎢에 14만여 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다. 해수욕, 돌고래 쇼, 온천 등으로 연간 500만 명에 가까운 관광객이 찾는 곳이나 서러운 역사를 지니고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 역사는 16세의 미소년, 아마쿠사 시로(天草四朗)로부터 시작된다. 이 섬에서는 1637년 일본 역사상 최초이자 대규모인 무장봉기(一揆)가 일어났다. 그 중심에 아마쿠사 시로(1621~1638)라는 소년이 있었다. 이 봉기를 크리스천들이 농민과 함께 일으켜서 ‘기리시탄의 난(吉利支丹の亂)’이라고도 하며, 나가사키의 시마바라와 구마모토의 아마쿠사가 공동 전선을 펼친 관계로 ‘시마바라·아마쿠사의 난(島原天草の亂)’이라고도 한다. 이 난의 총대장이 16세의 아마쿠사 시로였다. 당시의 상황에서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아마쿠사 시로의 본명은 마스다 시로(益田四朗)이다. 가톨릭 다이묘(大名)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1558-1600)의 낭인 마스다 진베이(益田甚兵衛, 1583-1638)의 아들이다. 본래 세례명은 제로니모(Geronimo)였으나 전투 당시 프란시스코(Francisco)로 바꿨다. 하라(原)성에서 봉기군과 함께 전사한 비극의 주인공 아마쿠사 시로는 일본에서 소설이나 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해서 그 당시의 아픈 역사를 후세에 전하고 있다. 또 그의 동상은 아마쿠사 크리스천관, 아마쿠사 시로 공원, 하라(原)성터 등 곳곳에 세워져 있다.
 
아마쿠사 시로 메모리얼 홀의 외관. [사진 장상인]

아마쿠사 시로 메모리얼 홀의 외관. [사진 장상인]

이 난(亂)이 일어난 연유는 이랬다. 1633년 에도 막부는 외국과의 왕래를 금지하고 크리스천 탄압에 열을 올렸다. 개종을 강요하고 ‘크리스천 전향증서’를 발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해외에서 잠입한 선교사들은 은밀하게 포교 활동을 했다. 그 결과 규슈의 아마쿠사(天草)와 나가사키(長崎)에 크리스천이 늘어났다. 특히 아마쿠사는 본토와 멀리 떨어진 섬인 관계로 감시의 눈을 피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이 무렵 결정적인 민중봉기를 촉발시킬 만한 참혹한 사건이 벌어졌다. 한 임산부가 차가운 강에서 물고문으로 죽임을 당한 것이다. 이유인즉 밀린 세금 때문이었다. 주민들은 당시 해마다 현물로 바치는 공납으로 수입의 약 50%를 쌀로 바쳐야 했다. 거기에 번(藩)의 크리스천 박해와 기근에 의한 어려움까지 겹치면서 무장봉기가 발생했던 것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크리스천 금제가 해제되고 난 뒤 아마쿠사에 세워진 오에 교회. [사진 장상인]

메이지 유신 이후 크리스천 금제가 해제되고 난 뒤 아마쿠사에 세워진 오에 교회. [사진 장상인]

1637년 12월은 숨가쁘게 돌아갔다. 1일, 시마바라의 무장봉기군은 하라(原)성터에서 농성을 준비했다. 3일, 아마쿠사 시로가 입성했다. 9일, 1만3000명이 각 지역에서 바다를 건너 합류해 무장봉기군은 총 3만7000여 명에 이르렀다. 20일, 막부군 4만 명이 하라성을 공격했으나 봉기군은 세 번에 걸쳐 막아냈다. 전투는 이듬해까지 이어졌다. 1638년 1월 1일 막부군의 총공격에서는 네덜란드의 군함에 의한 포격이 가세했고, 하라성의 포위를 강화하면서 성내의 식량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작전을 폈다. 2월 27일 서남제도로부터 동원된 연합군 12만5000명이 총공격을 개시했고, 28일엔 하라성이 최후를 맞는다. 막부군과 내통했던 야마다 에모사쿠를 제외하고 시로(四郞)를 비롯한 3만7000여 명의 봉기군은 모두 죽임을 당했다. 봉기군은 “지금 농성하고 있는 사람들은 다음 생애까지 친구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 전투에서 막부군도 큰 피해를 입었다. 사망 2000명, 부상 1만 명이 나왔다. 전투 이후 아마쿠사는 막부 직할 관리영토가 됐고, 크리스천 탄압은 더욱 강화돼 1639년에는 최종적인 쇄국령이 선포됐다. 이후 200년 이상 쇄국의 시대가 계속되었으나, 그러한 통제 하에서도 주민들의 신앙생활은 은밀히 계속됐다. 메이지(明治) 6년(1873년) 크리스천 금제(禁制)가 해제되고, 다음 해에 아마쿠사에 오에(大江)교회가 창립돼 종교 자유의 시대를 열었다.
 
아마쿠사 크리스천관 정원에 있는 아마쿠사 시로의 동상. [사진 장상인]

아마쿠사 크리스천관 정원에 있는 아마쿠사 시로의 동상. [사진 장상인]

“엄밀히 말하면 ‘시마바라·아마쿠사의 난’이 아니라 ‘자유와 평등의 싸움’이었습니다. 아마쿠사 시로는 자유·평등·박애의 상징이지요.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 이 작은 섬에 자유와 평등의 씨앗이 발아(發芽)된 것입니다.”
 
아마쿠사 시로 메모리얼 홀 나카야마 히로미(中山裕巳) 관장의 말이다. 목소리는 낮았으나 큰 울림이 있었다. 기념관의 한 코너에는 시마바라·아마쿠사 난(1637~1638)을 비롯해서 자유와 평등을 의미하는 르네상스(1500~1700), 프랑스 혁명(1789~1799), 미국의 남북전쟁(1861~1865)에 대한 기록이 전시돼 있다. 기념관의 안내문엔 이렇게 적혀 있다.
 
‘푸르고 맑은 하늘이었다/ 투명한 쪽빛의 바다였다/ 아름다운 자연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자유는 빼앗겼고/ 평등은 없었다.’
 
‘시마바라·아마쿠사의 난’은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일본 막부의 쇄국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 실패한 민중봉기였으나, 그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을 의미했다. 후일 문명개화에 뒤떨어진 일본에게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이라는 사회 진화를 위한 ‘원초적 본능’을 일깨웠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평등은 많은 사람들의 고귀한 희생에 의해서 이룩된 결과물이다. 자신들의 성취를 위한 이기적인 봉기는 경계해야 할 일이지만, 민중의 봉기를 살생으로 몰아가는 권력자들의 횡포는 사라져야 한다. 자유·평등·박애는 우리의 곁에서 결코 멀어지지 않을 듯싶다.
 
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대우건설과 팬택에서 30여 년 동안 홍보 업무를 했으며 2008년 홍보컨설팅회사 JSI 파트너스를 창업했다. 폭넓은 일본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으며 현지에서 직접 보고 느낀 것을 엮어 글쓰기를 하고 있다. 저서로 『현해탄 파고(波高) 저편에』 『홍보는 위기관리다』 『커피, 검은 악마의 유혹』(장편소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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