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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그건 당신의 윤리관이야

중앙일보 2018.03.23 01:56 종합 30면 지면보기
이경희 디지털콘텐트랩 차장

이경희 디지털콘텐트랩 차장

소설 『경마장 가는 길』로 유명했던 하일지(본명 임종주) 동덕여대 문예창작과 교수의 기자회견 영상을 봤다. 미투 폄하 발언과 제자 성추행 의혹이 맞물려 터지면서 대중 앞에 선 자리였다.
 
그는 “미투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무례하고도 비이성적인 고발을 받게 됐다”며 성추행 피해자에 대한 사과를 거부한 것은 물론 오히려 자신이 피해자라고 말했다. 기자회견장을 가득 채운 제자들을 깔보는 눈빛을 하고 기자들까지 가르치려 들었다.
 
하이라이트는 “교수님! 사과하세요. 비윤리적이잖아요!”라고 울먹이는 학생에게 “네가 아직 어려서 그래. 나는 잘못한 게 없어. 너의 윤리관이야”라고 쏘아붙이는 장면이었다.
 
하 교수는 안희정 전 충남지사를 고발한 김지은씨를 두고 수업에서 “언론이 이혼녀를 성처녀 취급하는 건 이중 잣대다. 자기도 즐겼을 수 있다”는 식의 말을 던져놓고는 “요즘 이런 말 하면 벼락 맞는다”면서 강의실 밖에 흘리지 말라고 입단속을 한다. 그의 바람과 달리 공론화되자 수업에 이의가 있으면 토론으로 해결했어야 한다며 학생들 탓을 한다. 하지만 강의 녹취록이나 기자회견에서 보여준 바로는 학생들에게 반론권을 주는 모습이 그려지지 않는다.
 
하 교수는 야유하는 학생들에게 “내 입을 막으려 하지 말라”고 했다. 그렇다면 학생들의 입도 막지 말았어야 했다. 어린 학생들이라 윤리를 모른다고 무시하면서, 성추행 피해를 고발한 제자에겐 성인 대 성인의 선택이었다며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야말로 이중적 잣대다. 그가 한 말을 그대로 돌려주자면 ‘그건 당신의 윤리관’일 뿐이다.
 
하 교수가 쏟아낸 말은 오랫동안 차별받아 온 ‘어린 것들’과 ‘여성’에 대한 혐오 표현이다. 법철학자 홍성수의 『말이 칼이 될 때』에 따르면 혐오 표현은 ‘소수자’를 향할 때 성립된다. 같은 말이라도 다수를 향할 때와는 달리 차별을 조장하고, 상처를 주며, 배제와 고립을 낳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하 교수에게 감정이입을 하며 마이크 쥔 사람만의 ‘표현의 자유’를 지지하고, ‘당당하면 마스크를 벗으라’며 여학생들을 비난하는 댓글이 넘쳐난다. 미투 폭로자에 대한 2차 가해가 강의실에서 버젓이 일어나는 걸 목격한 학생들에게 얼굴을 드러내라는 건 폭력이자 협박임을 모르는 걸까.
 
직장 내 성희롱으로 삼성과 싸워 이긴 뒤 관련 사건을 다루는 법조인이 된 이은의 변호사의 저서 『예민해도 괜찮아』에 딱 맞는 해석이 담겨 있다. 그에 따르면 혐오는 “강자를 미워하고 싸우는 것보다는 약자를 미워하고 싸우는 것이 쉽고 편하기 때문”에 하는 “비겁하고 위험한 선택”이다.
 
이경희 디지털콘텐트랩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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