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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문 대통령이 오슬로로 가는 두 관문

중앙일보 2018.03.23 01:45 종합 31면 지면보기
장 훈 중앙일보 칼럼니스트·중앙대 교수

장 훈 중앙일보 칼럼니스트·중앙대 교수

몇 주간 이어져 온 한반도 그레이트 게임 속에서 평화의 길을 모색 중인 문재인 대통령은 올해 노벨평화상에 다가설 수도 있다. 사실 필자는 연말께 노르웨이 오슬로의 노벨평화상위원회로부터 기쁜 소식이 날아오기를 문 대통령 지지자들만큼이나 간절히 바라고 있다. 노벨평화상은 문 대통령 개인의 명예를 넘어 한반도에 평화 인프라가 어느 정도 구축됨을 뜻하기에 우리 모두의 바람일 수도 있다. 지난가을과 겨울 트럼프와 김정은 두 지도자 간에 오갔던 말 폭탄과 핵의 공포를 새삼 떠올려 보면 문 대통령의 대화와 제재의 능숙한 이중주는 뜨거운 박수를 받을 만하다(예컨대 연쇄 정상회담의 합의 없이 또다시 북·미 간 말 폭탄이 오고 가는 가상적 상황을 지금의 국면과 비교해 보라).
 

민주주의 신념 강한 문 대통령이
8년짜리 제왕적 대통령의 길을
열어준다면 역설적 반전이다
개헌 과정에도 원전 공론화처럼
시민들의 토론과 합의 반영하고
연말쯤 노벨평화상 받았으면 …

그런데 노르웨이 노벨평화상위원회가 2000년 김대중 대통령에게 노벨평화상을 수여했던 근거에는 평화뿐 아니라 민주주의 증진이 큰 몫을 한 바 있다. 노벨평화상위원회는 김 대통령 노벨상 수여 발표문 첫머리에서 “한국은 1997년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으로 세계 민주국가의 대열에 결정적으로 합류했다. 김대중은 대통령으로서 민주적인 정부를 강화하고 한국 내부의 화해를 촉진시키기 위해 노력해왔다”고 강조했다. 이어진 두 번째 문단에서 “햇볕정책을 통해 김 대통령은 남북한 간의 50년 이상 된 전쟁과 적대감 극복을 추진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사실 요즘 평화의 길을 열어가고 있는 문 대통령의 국내정치에 대해 이런저런 비판을 내놓기는 쉽지 않다(개헌에 대해 엉거주춤한 여당이나 명분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분권형 개헌을 내세운 자유한국당을 돌아보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필자는 문 대통령이 한반도 평화의 기틀을 닦는 것 못지않게 토론과 합의의 민주주의를 더 강화해야 하는 과제를 동시에 안고 있다고 믿는다.
 
그간 문 대통령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문 대통령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은 확고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난 몇 주간 이어져 온 문 대통령의 개헌 발의는 두 가지 관점에서 비판의 여지가 있다. 첫째, 문 대통령 개헌안에는 누구나 공감할 내용이 다수 포함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노력은 대통령 연임제라는 하나의 거대한 장애물 앞에서 빛을 잃는다. 생명권·안전권·정보기본권의 신설에 대해 필자는 박수를 보낸다. 또한 지방분권과 국민발안제·국민소환제에 대해서도 만시지탄이지만 뜨거운 지지를 보낸다.
 
장훈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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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대통령 연임제는 이 모든 진보를 퇴색시킬 수 있다. 우리는 지난 30년간 대통령 단임제라는 틀 안에서조차 제왕적 관습의 뿌리를 뽑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임기 초반 여러 정치적 자본이 풍부한 대통령에 대한 견제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대통령 인사권에 대한 국회의 견제, 제왕적 여당 총재로서의 대통령에 대한 견제 제도가 도입돼 왔지만 임기 전반기 대통령의 압도적 권위 앞에서 그 같은 장치들은 그저 종이호랑이일 뿐이었다. 게다가 수평적·개방적 의사소통에 익숙하지 않은 채 살아온 50~60대 남성이 다수를 차지하는 청와대 참모진, 여당 의원들은 감히 대통령에게 이견을 내놓지 못한다.
 
지난 대선 때 유권자에게 했던 개헌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문 대통령의 진지한 표정 앞에서 명시적으로 뚜렷하게 이견을 내놓은 참모는 유감스럽지만 없었던 듯싶다. 최장집 교수의 지적대로 문 대통령이 제왕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촛불 시민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문 대통령이 미래의 임기 8년짜리 제왕적 대통령의 길을 열어준다는 것은 역설적 반전이다.
 
둘째, 필자는 지난가을 이 지면에서 문 대통령이 주도하던 신고리 공론화위원회의 민주주의 방식을 보수주의자들도 진지하게 수용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마찬가지 논리로 신고리 원전보다 훨씬 중대한 정부의 헌법 개정안 준비 과정에서도 시민들이 광범하고 자유롭게 찬반 토론과 합의 형성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가졌어야만 한다. 요즘 이어지고 있는 청와대 참모들의 개헌안 설명이나 합의 기능을 상실한 국회에 대한 합의 압박 등은 지난해 시민들이 이뤄냈던 토론과 합의의 공론민주주의에는 턱없이 모자란다.
 
거듭 말하지만 필자는 올 연말 문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안팎의 온갖 견제를 뚫고 문재인 정부가 소극적 평화를 넘어 적극적 평화의 기틀을 다질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밖으로의 평화가 절실한 만큼 안으로의 합의와 토론 역시 절실하다. 평화의 새싹을 틔운 문 대통령이 민주주의와 평화의 동시 성숙이라는 업적을 안고 오슬로에 가기를 기대해 본다.
 
장 훈 본사 칼럼니스트·중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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