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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불러줄 때 비로소 꽃이 되는 너, 야생화

중앙일보 2018.03.23 01:02
[더,오래] 김순근의 간이역(20)
다양한 봄꽃이 피기 시작했다. 매서운 겨울 추위로 인해 봄이 더욱 살갑게 느껴지고, 매화, 산수유, 벚꽃 등 봄꽃 명소마다 많은 사람으로 인산인해를 이룰 전망이다.
 
이들 유명 봄꽃에 가려있지만,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나는 땅에는 또 다른 봄꽃이 피어있다. 작고 바닥에 깔리듯 피어 잘 보이지 않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작은 꽃잎 속에 아름다움을 잔뜩 담고 있다. 봄소식을 전해주는 수많은 야생화. 우리가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다가와 진정한 꽃이 된다.


 
오랑캐가 침입할 때 피던 제비꽃
제비꽃. 제비꽃은 품종이 많기로 유명하다. 자주색 외에 흰색, 노란색 등 색깔이 다양하다. [사진 김순근]

제비꽃. 제비꽃은 품종이 많기로 유명하다. 자주색 외에 흰색, 노란색 등 색깔이 다양하다. [사진 김순근]

 
흔히 제비꽃이라고 하면 자주색 계통의 제비꽃을 말한다. 제비꽃은 품종이 많기로 유명하다. 자주색 외에 흰색, 노란색 등 색깔이 다양하고 그에 따라 이름도 제비꽃, 흰제비꽃, 노랑제비꽃 등 수없이 많다.
 
흰색 중에서도 남산제비꽃, 태백제비꽃, 화엄제비꽃 등 지명을 딴 많은 이름이 있어 전문적으로 들어가면 복잡하다. 그래서 자주색 계통은 그냥 제비꽃, 흰색은 흰제비꽃, 노란색은 노랑제비꽃 정도로만 기억해도 무방하다.
 
제비꽃이란 이름은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올 무렵에 피는 꽃이라서 유래됐다고 한다. 남부지방에서는 '오랑캐꽃'으로도 불렸다. 꽃의 생김새가 오랑캐의 투구모양과 비슷하고 북쪽에서 오랑캐가 침입할 즈음 피는 꽃이었기 때문이다.
 
실제 대규모 오랑캐가 침입한 정묘호란은 1월 중순에, 병자호란은 12월 중순에 일어났다. 통신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였음을 고려하면 중부 이남 지방의 경우 이른 봄에 침입 소식을 전해 들었을 것으로 보이고, 때마침 제비꽃이 피기 시작하니 오랑캐꽃이라 부르지 않았을까.
 
제비꽃의 꽃말은 ‘겸손’이다. 꽃이 거의 바닥에 붙어있을 정도로 키가 작아 자세히 보려면 바짝 엎드려야 하니 보는 이도 겸손할 수밖에 없다.


 
종다리의 머리 깃을 닮은 현호색
꽃을 정면으로 바라보면 더욱 진가를 발휘하는 현호색. [사진 김순근]

꽃을 정면으로 바라보면 더욱 진가를 발휘하는 현호색. [사진 김순근]

 
3~4월 보라색 또는 홍자색의 작고 기다란 꽃이 바닥에 깔리듯 핀다. 꽃이 일제히 한쪽으로 피다 보니 꽃부리의 일부가 길게 뒤쪽으로 뻗어나 마치 작은 벌레처럼 느껴진다.
 
위에서 바라보면 마치 종다리의 머리 깃을 닮았다. 그래서 학명이 ‘코리달리스 레모타(Corydalis remota)’다. 코리달리스(Corydalis)는 종달새를 뜻하는 희랍어 'korydallis'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현호색은 양귀비목에 속한다. 꽃을 정면으로 바라봐야 양귀비목 식물의 참모습이 드러나는데, 작고 아름다운 여인의 입술을 빼닮았다. 특히 홍자색 꽃은 연지 바른 새색시 입술처럼 강렬하면서도 곱다. 입술 닮은 현호색 꽃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꽃들이 뭔가를 속삭이는 것 같다.


 
기품 넘치는 여인의 이미지, 얼레지
엘레지. 백합과의 엘레지는 주로 산속에서 자라며, 이른 봄 숲속 나무에 새잎이 나기 전에 꽃을 피웠다가 나뭇잎이 나올 무렵에 열매를 맺은 뒤 생을 마감한다. [사진 김순근]

엘레지. 백합과의 엘레지는 주로 산속에서 자라며, 이른 봄 숲속 나무에 새잎이 나기 전에 꽃을 피웠다가 나뭇잎이 나올 무렵에 열매를 맺은 뒤 생을 마감한다. [사진 김순근]

 
백합과의 얼레지는 주로 산속에서 자란다. 이른 봄 숲속 나무에 새잎이 나기 전에 꽃을 피웠다가 나뭇잎이 나올 무렵에 열매를 맺은 뒤 생을 마감한다.
 
언젠가 봄 산행에 나선 일행에게 앙증맞은 보라색 꽃을 가리키며 ‘얼레지’라 말했더니 그는 ‘엘레지’로 기억했다. 가수 이미자 씨를 잘 아는 연배여서 ‘엘레지의 여왕’이란 단어에 익숙한 탓이다.
 
‘엘레지’는 슬픔을 노래한 가요나 시 등을 뜻하는데 ‘얼레지’는 수수하고 소박함으로 대변되는 야생화 이미지와 달리 상당히 화려한 느낌이다. 보라색 꽃이 아래를 향해 피어 얼핏 수줍은 새색시의 모습이지만, 자세히 보면 꽃잎을 한껏 뒤로 젖힌 모양새에서 기품 넘치는 여인의 이미지가 느껴진다.
 
멀리서 보면 또 다른 느낌이다. 아래를 향해 피어있는 얼레지꽃을 멀리서 바라보면 개구쟁이처럼 폴짝폴짝 뛰어가는 듯하다.


 
지금은 봄까치꽃으로 불리는 큰개불알꽃
씨주머니가 개의 불알을 닮아 큰개불알꽃으로도 불리는 봄까치꽃. [사진 김순근]

씨주머니가 개의 불알을 닮아 큰개불알꽃으로도 불리는 봄까치꽃. [사진 김순근]

 
봄이 시작되는 들이나 산자락에 흔히 볼 수 있는 꽃이다. 사람들에게 이 꽃 이름을 얘기하면 웃자고 농담하는 줄 안다. 작고 앙증맞은 꽃 모양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큰개불알꽃’이란 이름 때문이다.
 
지금은 봄까치꽃으로 부르는 이들이 적지 않지만, 아직도 큰개불알꽃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8~9월에 열리는 작은 방울 모양의 씨주머니가 개의 불알처럼 생겼다고 해 일본에서 붙인 이름을 그대로 번역했기 때문이다.
 
남쪽에는 2월을 전후해, 중부지방에서는 3~4월을 전후해 남색의 아주 작은 꽃이 피는데, ‘큰’자가 들어간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새끼손가락의 손톱보다 작다.
 
요즘은 개불알꽃의 다른 이름인 봄까치꽃으로 부르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작고 앙증맞은 꽃 생김새와 잘 어울리는 이름인데 아직 공식적인 개명이 이뤄지지 않아 큰개불알꽃과 혼용되고 있다. 언젠가는 봄까치꽃으로 공인받아 이쁜 이름을 되찾길 기대해본다.


 
양지바른 곳이면 어김없이 피는 양지꽃
양지꽃. 토질과 상관없이 햇볕이 잘 드는 곳이면 어디든 잘 자라 양지꽃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사진 김순근]

양지꽃. 토질과 상관없이 햇볕이 잘 드는 곳이면 어디든 잘 자라 양지꽃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사진 김순근]

 
봄날, 햇볕이 잘 드는 양지바른 곳에 어김없이 노란 꽃이 피는데 십중팔구 양지꽃이다. 토질과 상관없이 햇볕이 잘 드는 곳이면 어디든 잘 자라 양지꽃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바위틈에서 자라면 돌양지꽃, 물가에서 자라면 물양지꽃 등 종류가 20여종에 이를 정도로 많은데 양지꽃이 이들을 대표한다. 꽃 모양이 뱀딸기 꽃이랑 아주 흡사해 혼동되지만 꽃을 위에서 바라보면 확연히 구별된다. 뱀딸기 꽃은 꽃받침 위에 보조 끝 받침이 있어 꽃잎 사이로 끝이 뾰족한 보조 꽃받침이 보이지만 양지꽃은 보조 꽃받침이 없다.
 
김순근 여행작가 sk4340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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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근 김순근 여행작가 필진

[김순근의 간이역] 은퇴는 끝이 아니다. 새로운 도전이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기에 걱정과 두려움도 있겠지만, 성공의 성취감은 무엇보다 값질 것이다. ‘간이역’은 도전에 나서기 전 잠시 쉬어가는 곳이다. 처음 가는 길은 먼저 간 사람들이 겪은 시행착오 등 경험들이 큰 힘이 된다. 성공이라는 종착역에 도착한 이들의 경험담과 조언을 공유하고, 좋은 힐링 여행지를 통해 도전에 앞서 갑자기 많아진 시간을 알차게 보내며 막연한 두려움을 씻어내고 새 출발의 의지를 다지는 데 도움이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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