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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울 수 없는 그때 그 일, 2018분 동안 쏟아내다

중앙일보 2018.03.23 00:47 종합 12면 지면보기
#“성교육을 받지도 못한 나이에 집 앞에서 모르는 남성에게 성추행당한 적이 있다. 그 일을 일기장에 한 글자씩 썼다. 어머니가 밤에 일기장을 보고 제게 말씀하셨다. ‘글을 지우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손으로 그 글자를 지웠지만 머릿속에서는 지울 수 없었다.”(20대 대학생 여성 A씨)
 

청계광장서 성폭력 피해 이어말하기
인터넷·현장접수 통해 자유발언
주최 측 “조직문화·법이 괴물 키워”

#“모르는 아저씨가 삼촌 친구라며 다가왔고 아무것도 모르는 6살 여자아이는 성폭력을 당했다. 20대 삼촌, 고등학생 사촌, 아버지 직장 동료도 내게 손을 댔다. 죽는 날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여름날 ‘덥겠다’며 내 팬티를 벗긴 것을. 나는 그놈의 손가락을 잘라버리는 상상을 수없이 했다.”(40대 논술 강사 여성 B씨)
 
직·간접적으로 겪은 성폭력과 성차별을 규탄하는 ‘2018분(33시간 38분) 동안의 이어 말하기’ 행사가 22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렸다. 이주여성 참가자들이 미투 운동 지지 발언을 하고 있다. [우상조 기자]

직·간접적으로 겪은 성폭력과 성차별을 규탄하는 ‘2018분(33시간 38분) 동안의 이어 말하기’ 행사가 22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렸다. 이주여성 참가자들이 미투 운동 지지 발언을 하고 있다. [우상조 기자]

22일 서울 종로 청계광장. 다양한 연령대의 각계각층 여성들이 무대에 올라 자신이 겪은 성폭력 피해와 아픈 상처를 기억에서 끄집어냈다. 마이크를 잡은 여성들은 떨리는 목소리로 고백을 이어갔다. 한참동안 말을 잇지 못하는 이도 있었다. 이따금 고개를 떨굴 때면 경청하던 다른 여성들이 박수와 환호로 “힘 내라”는 응원 메시지를 보냈다.
 
이 행사의 제목은 ‘2018분 이어 말하기’. 이날 오전 9시 22분부터 23일 오후 7시까지 2018분(33시간 38분) 동안 계속한다는 의미다. 인터넷과 현장접수 등을 통해 자유발언 의사를 밝힌 참가자들이 직·간접적으로 겪은 성폭력 피해를 고백하고 성차별을 규탄하자는 취지였다. 미투 운동 지지 시민단체 모임인 ‘미투 운동과 함께하는시민행동’이 마련했다.
 
앞서 주최 측은 “성폭력이 만연한 세상에 분노하고, 변화를 촉구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발언자로 참가할 수 있다”며 “변화에 동참하고 싶은 누구나 이 자리에 함께할 수 있다”고 밝혔다.
 
참석자들은 ‘#With you’ ‘#미투가 바꿀 세상 우리가 만들자’ ‘Speak Out’ 등의 피켓을 들고 자리를 지켰다. 이들은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연대의 의미를 나타내는 검은색 끈을 묶는 퍼포먼스를 펼치기도 했다. 주최 측 관계자는 “검은색 끈은 피해자의 목소리와 가해 사실 고발을 계속 이어 말한다는 것을 상징한다”고 설명했다.
 
청계광장 한쪽에는 참석자들의 글이 적힌 길이 25m 대형 게시판이 세워졌다. 게시판에는 ‘도둑질은 하지 말아야 한다면서 왜 강간은 피해자가 예방해야 하는 문제라고 해야 하는가’ ‘초등학생이던 날 추행했던 자식아. 부끄럽고 비겁한 줄 알아라’ ‘나는 회사의 꽃·치어리더·꽃뱀·기쁨조도 아니다’ 등의 대자보가 붙어 있었다.
 
사회를 맡은 최진협 한국여성민우회 사무처장은 “(미투 폭로가 이어진) 이제야 성폭력 문제를 몇몇 괴물의 문제로 봉합하고 떼어내려 하지만 괴물을 키우고 두둔한 것은 조직의 문화와 법률 해석에 있다”며 “괴물은 개인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을 죄어 온 조직과 사회, 규범”이라고 강조했다.
 
행사가 끝나는 23일 오후에는 ‘성차별, 성폭력 끝장 문화제 미투가 바꿀 세상, 우리가 만들자’라는 주제로 촛불 문화제가 개최된다. 
 
최규진·권유진·정진호 기자 choi.ky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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