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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 노동 가치, 측정 가능한가" "헌법에 담을 가치인가" 뜨거운 논란

중앙일보 2018.03.21 15:05
#1. A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정문을 지키는 수위와 B중공업 조선소에서 수위 직을 맡은 두 사람이 있다. 이들은 모두 드나드는 차량을 통제·관리하면서 경비 업무를 겸한다. 비록 소속사도, 일하는 장소도 다르지만 수위라는 업무의 속성, 업무 강도는 매우 유사하다. 이들은 '동일한 노동 가치'를 지닌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2. 시계 제조사인 C사에서 조립 일을 맡은 두 직장 동료가 있다. 한 명은 10년 차 숙련공, 한 명은 1년 차 초보다. 10년 차가 시간당 10개의 시계를 조립하는 데 반해 1년 차는 4~5개 수준에 그친다. 이들은 시계 조립이라는 '동일 노동'을 수행하고 있다. 노동의 가치는 물론 다르다.
  
청와대가 20일 노동권을 강화하기 위한 헌법개정안을 내놓으면서 재계와 경영학계에서는 논쟁이 뜨거워지고 있다. 개헌안 내용 중 노동과 임금에 대한 대목은 ‘동일 가치 노동에 대한 동일수준의 임금 지급 노력 의무화'로 요약된다.
조국 민정수석이 20일 오전 청와대 춘추관 대브리핑룸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발의할 개헌안을 설명하고 있다.[청와대사진기자단]

조국 민정수석이 20일 오전 청와대 춘추관 대브리핑룸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발의할 개헌안을 설명하고 있다.[청와대사진기자단]

개헌안에 대해 경영계는 공식적으로는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정부의 친노동정책에 사사건건 반대 입장을 나타내기가 부담스러워서인 것으로 해석된다.
 
숙련도 같은 노동가치 비교 측정 불가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여러 가지 우려 섞인 이야기들이 오간다. 임금을 일한 결과, 즉 생산물에 초점을 맞춰 지급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일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는 방식으로 전환하라는 요구이기 때문이다. 재계는 크게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적용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우선 '측정의 문제'다. 노동의 정도, 노동의 가치 수준을 비교하는 것은 일부 생산직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재계 관계자는 "노동의 가치는 눈에 보이는 정량지표가 전부가 아니라 생산품의 품질, 업무 프로세스 전반에 대해 책임을 지는 정도 같은 정성 지표를 고려해야 정확한 측정이 된다. 이를 생산 현장에 적용해 노동의 가치를 비교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얘기"라고 말했다. A공장의 수위와 B공장의 수위가 같은 임금을 받을 경우, 수익이 크게 나는 회사의 소속원이 적자 기업의 소속원과 같은 대우를 받는 것이 옳으냐는 문제가 생긴다. 
학계에서는 '동일 노동 가치'뿐 아니라 숙련도가 차이가 나는 직원들이 같은 일을 한다고 해서 '동일 노동'으로 보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본다. 같은 일을 하는 C사의 두 직원 간에 두 배 이상의 효율성 차이가 있는데 동일 임금을 지급하면 또 다른 불평등 문제가 생긴다.
 
임금 부담 늘면서 오히려 불평등 심화 가능성
재계는 임금 부담 증가도 우려한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은 능력에 따른 보상이 아니라 노동에 따른 보상을 추구함으로 임금 격차를 줄인다는 원칙을 전제로 한다. 이 원칙은 비정규직 등 저임금 근로자의 소득이 오르고 상대적으로 고소득인 정규직의 임금이 내려가야 작동한다. 그러나 정규직 대부분이 강성 노조인 국내 현실을 고려하면 얘기는 달라진다. 정규직 임금은 내려가지 않고 비정규직의 임금만 점차 오르는 쪽으로 작동할 가능성이 높다. 임금 부담이 늘어나면 중소기업 중에 한계기업이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퇴출기업이 늘면서 일자리가 줄어들 수 있다는 얘기다. 권순원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는 "임금 격차를 줄이기 위해 도입한 정책이 기업에 부담을 주고, 결과적으로 소득 격차 확대라는 부작용을 낳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특히 ‘임금 상승→한계기업 증가→파산 증가→일자리 감소'의 사이클은 대기업보다 중소기업에서 작동할 가능성이 크다. 중소기업은 국내 고용의 88%를 책임지고 있다.
 
재계에서는 '동일 노동 가치, 동일 임금'이 시대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의견도 많다. 익명을 요구한 재계 관계자는 “글로벌 기업들은 성과주의를 앞세우고 창의성·효율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임금 정책 방향을 잡고 있다"며 "동일노동 가치, 동일임금 의무화는 산업화 시대의 낡은 개념이 아닌지 짚어봐야 한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근로기준법이나 노동법이 아닌 헌법에 이런 가치를 명문화하면 친노조 국가라는 이미지를 부각해 투자유치를 어렵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일자리 늘리기에도 도움이 안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올해 초 경제계 신년인사회에 참석한 이낙연 국무총리(오른쪽에서 두번째)와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맨 우측) 등 재계 인사들.[중앙포토]

올해 초 경제계 신년인사회에 참석한 이낙연 국무총리(오른쪽에서 두번째)와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맨 우측) 등 재계 인사들.[중앙포토]

 
그리스·포르투갈 등만 헌법에 명시
 
경영학계는 노동의 가치와 임금을 법률이 아닌 헌법에 담는 것이 적절한지 살펴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동일 노동 가치라는 모호한 내용을 최상위법에 명시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얘기다. 조준모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는 "모법인 헌법에는 큰 정신과 가치, 방향성, 원칙을 담아야 한다. 이를 실현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하위법이나 개별법에 담아야 한다"고 말했다. 모법이 구체성을 띄면 하위법을 규제하는 방향으로 작동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해외에서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헌법에 명시한 국가로는 그리스·아르헨티나·포르투갈·멕시코 4개국이 꼽힌다. 모두 자본주의 리더 국가나 산업 선진국이라고 보기 어려운 나라들이다. 조 교수는 "헌법이 아닌 하위법에 이 정신을 넣은 나라들은 많지만, 이 경우에도 젠더(성), 종교 등을 이유로 부당한 임금을 받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한 방어적 성격"이라며 "같은 직군에 있는 사람은 같은 임금을 받아야 한다고 강제하는 국가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급여 제도의 선진화를 위해 노동 가치와 임금을 연계할 게 아니라 미국이나 유럽의 직무급제를 눈여겨봐야 한다는 지적도 많다. 한국경제연구원 정조원 고용창출팀장은 "미국의 경우 영업 10년 차는 얼마, 인사 5년 차는 얼마처럼 업종별·연차별로 급여 수준이 정리돼 있다. 직무급이 노동시장의 표준가격처럼 작동해 같은 직급의 인력을 고용하면 비용 부담이 갑자기 늘거나 줄지 않는다"고 말했다. 
미국·유럽도 처음부터 직무급이 정착한 것은 아니다. 산업 개발 시기에 호봉제로 시작했다가 산업이 고도화되고 사회가 성숙해지면서 직무급으로 전환했다. 한국의 경우 고속 성장하면서 급여 체계가 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고성장 시기에는 직원들의 호봉이 높아져도 기업이 여력이 있지만, 지금처럼 저성장에 접어들면 높은 호봉을 감당하기 어려워진다. 정 팀장은 "국내에서는 생산직의 70%가 호봉제여서 정규직 내에서조차 ‘동일 노동·동일 임금’ 대신 근속연수 등으로 임금이 차등 적용된다"며 "직무급 체계로 빨리 옮겨가야 노동시장의 불균형 문제부터 고용 안정성 문제까지 함께 풀린다"고 말했다. 
박태희 기자 adonis55@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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