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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에 붙여놓고 외웠더니 … 고문 3만 자 술술

중앙일보 2018.03.21 00:23 종합 23면 지면보기
31년 월급쟁이 생활 뒤 동네훈장으로 거듭난 석한남씨는 ’공부가 직업“이라고 했다. [사진 석한남]

31년 월급쟁이 생활 뒤 동네훈장으로 거듭난 석한남씨는 ’공부가 직업“이라고 했다. [사진 석한남]

우리 옛 문헌에 대한 사랑이 남달라서일까. 동혼재(東昏齋) 석한남(59)씨는 별명이 ‘동네훈장’이다. 금융업계에서 일하며 독학으로 한학과 고서화를 공부한 그는 암기와 암송을 비법으로 꼽았다.
 

고문헌 수집가·연구자 석한남씨
국립중앙도서관에 168점 기탁
가산 탕진했어도 공부하니 행복

“무조건 외웠습니다. 지금도 3만 자 정도의 고문(古文)을 외웁니다. 20여 년 하루도 쉬지 않고 새벽에 일어나 눈으로, 입으로 되풀이 외우다보니 어느 날 번쩍 문리(文理)가 터지더군요.”
 
그의 집에 가본 사람은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독학자의 집념에 놀란다. 사방 가득 외워야 할 문장이 붙어있어서다. 한문 초서(草書)를 읽어내는 탈초(脫草)에 능한 그의 비결은 벽을 뚫을 지경으로 오래 보고 익힌 그 지극정성에서 온다. 부처님 친견하는 마음으로 글자를 모시면 오리무중이던 초서가 뜻을 드러낸다.
 
“세월에 밀려 푸대접받는 고서(古書)의 세계에 빠진 뒤, 말 그대로 가산을 탕진했습니다. 역사적으로 가치있는 옛 간찰(簡札)과 시고(詩稿) 등 1000여 점을 모았는데 제가 발품 팔아 소장한 옛 자료의 가치를 드러내자니 직접 번역하고 고증하는 수밖에 없었죠. 암호 같던 글자, 짐작조차 힘들던 문장 하나하나를 비밀의 문을 열 듯 풀 때마다 밀려오는 희열에 다시 태어난 듯 했습니다.”
 
그는 최근 소장해 온 고문헌 133종 168점을 국립중앙도서관에 기탁했다.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이자 당대 손꼽히는 서예가인 안평대군 이용(1418~53)이 1446년 쓴 ‘안평대군 행초서 십 폭 병풍’, 집현전의 대표 학자였던 최항(1409~74)의 『불설무량수경』, 조선 전기에 학자로 활동한 조말손의 소장인(所藏印)이 찍혀있는 초주갑인자본(1434년 조선조에서 세 번째로 만든 금속활자) 『사기』 등 보물급 희귀 자료가 많다. 그의 호를 딴 ‘동혼재 장서’는 소장인이 분명한 점이 특징으로 그만큼 확실한 이력과 근거를 지녔다.
 
“소장인을 보면서 선조들의 인장 연구를 나름 열심히 했습니다. 지난해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옛 인장에 대한 강의를 하게 됐고 그 인연으로 기탁도 결심하게 됐지요. 앞으로 이 자료가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국립중앙도서관은 오는 10월 2일부터 본관 1층 전시실에서 ‘소장인으로 만나 본 옛 문헌의 세계’라는 주제로 동혼재 기탁 기념 특별전시를 열 예정이다. 안평대군의 병풍에 찍힌 대형 인장에는 ‘폐문즉시심산(閉門卽是深山), 독서수처정토(讀書隨處淨土)’, 즉 ‘문을 닫으니 곧 깊은 산이요 책을 읽는 곳마다 정토세상이네’라는 문구가 새겨져 안평대군의 심성을 느끼게 한다.
 
“『명문가의 문장』 『다산과 추사, 유배를 즐기다』 두 권 책을 쓰면서 햇빛 볼 기약 없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우리 고문서의 운명을 자주 생각했습니다. 그들을 깨워 새 생명을 불어 넣기 위해 스스로를 유배시키는 각오로 동네훈장이 되겠습니다.”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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