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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평창 패럴림픽이 두 가지 디딤돌 역할을 해준다면

중앙일보 2018.03.15 01:47 종합 29면 지면보기
석창우 의수화가

석창우 의수화가

살다 보면 누구나 감당하기 힘든 시련과 마주할 때가 있다. 회복 가능한 수준에서 마무리할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이전 상태로 돌아가지 못하는 경우도 생긴다. 힘겨운 상황에서 내리는 선택들이 이후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 판단은 한순간이지만 결과는 크게 달라진다.
 
34년 전인 1984년 10월 29일. 근무 중에 2만2900볼트의 고압 전류에 감전되지 않았더라면 내 인생이 어떻게 흘러갔을까. 부질없지만 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궁금증이다. 27일간 사경을 헤맨 끝에 눈을 떴을 때 나는 다른 사람이 돼 있었다. 낚시와 친구를 좋아하던 혈기왕성한 스물아홉 살 청년은 사라지고, 양팔과 발가락 두 개가 없는 중증 장애인이 돼 있었다.
 
그런데 ‘장애인 석창우’를 ‘의수 화가 석창우’로 탈바꿈시켜준 은인이 있었다. 바로 내 아내였다. “빨리 낫기만 해요. 언젠가는 당신이 좋아하는 낚시를 다시 할 수 있는 날이 올 거예요.” 아내의 격려는 이후 1년 반의 힘겨운 병실 생활을 견디는 동안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옷의 단추를 끼우거나 숟가락을 들어 올리는 등 평범한 일상생활조차 주변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나에게 “의수를 사용해서 그림 그리는 방법을 배워보면 어떻겠어요”라고 제안한 것도 아내였다. 붓을 의수 끝 갈고리에 끼우는 것조차 힘겨워하던 내가 ‘수묵 크로키’(사진)라는 새로운 영역에 과감히 도전장을 던질 수 있었던 배경에도 아내가 있었다. 힘들 때 누군가가 던진 긍정의 메시지에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얻어 다시 일어서는, 작지만 강렬한 기적을 나는 직접 체험했다.
 
의수화가 석창우 화백이 평창 올림픽&패럴림픽을기념해 그린 그림

의수화가 석창우 화백이 평창 올림픽&패럴림픽을기념해 그린 그림

2018 평창 겨울패럴림픽 무대를 누비는 선수들도 모두가 기적의 주인공들이다. 나에게 아내와 붓이 있었다면, 그들에겐 패럴림픽 그 자체가 중요한 목표이자 따뜻한 위안이다.
 
네덜란드의 여자 스노보드 선수 비비안 멘텔 스피 선수는 암 투병 끝에 다리를 절단하고, 재발한 암세포가 몸 이곳저곳에 퍼진 상황에도 평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태어날 때 분만 사고로 왼팔 감각을 잃은 장애인 노르딕 국가대표 권상현 선수는 목표 의식을 잃고 방황했으나 장애인 스키를 접한 뒤 삶의 의욕을 되찾았다. 한때 체중이 119㎏까지 나갔지만, 3년 동안 강도 높은 훈련으로 50㎏을 감량하고 국가대표 타이틀에 어울리는 선수가 됐다. 평창패럴림픽이 매일 들려주는 스토리는 이렇듯 경이롭고 감동적이다.
 
나에게도 패럴림픽은 특별하다. 4년 전 소치 패럴림픽 폐막식에 초대받아 수만 명의 관중 앞에서 수묵 크로키 퍼포먼스를 선보인 게 예술가로서 자존감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이전까진 칭찬을 들어도 ‘팔이 없는 것치곤 잘 그린다’는 뉘앙스로 받아들였는데, 소치를 계기로 마음을 활짝 열고 소통을 시작했다. 이후 보답하는 마음으로 평창 올림픽과 패럴림픽의 성공 개최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가는 곳마다 평창을 알렸고 올림픽 개막 D-1000일과 D-150일, 패럴림픽 D-150일에 기념 퍼포먼스를 했다. 구체적으로 설명할 순 없지만, 오는 18일에 열리는 패럴림픽 폐막식에도 영상으로 참여한다. 두 번의 패럴림픽에 연속으로 참여할 기회를 얻게 돼 감사한 마음뿐이다.
 
1988년 이후 30년 만에 한국에서 다시 치르는 패럴림픽이 우리 사회에 두 가지 유산을 남기길 기대한다. 장애인들에게는 힘들어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가치를, 비장애인들에게는 ‘나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선을 긋지 않는 존중의 의미를 되새기는 기회가 되면 좋겠다. 장애인들이 스스로 좌절하지 않고, 차별받지 않는 사회로 진화하는데 패럴림픽이 디딤돌 역할을 하길 바란다.
 
올림픽과 견줘 패럴림픽의 감동을 TV로 접할 기회가 부족한 건 그래서 매우 아쉽다. 패럴림피언들의 땀과 눈물에도 시청률로는 따질 수 없는 특별함이 담겨 있다고 믿는다. 뒤늦게나마 방송 편성을 좀 늘리기로 결정해 다행이다.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으로 살아간다는 건 수많은 편견을 딛고 일어서는 과정의 연속이다. 평창패럴림픽에 출전한 각국 국가대표 선수들은 장애가 주는 신체적 한계와 무거운 절망감을 극복한 성공 사례의 주인공들이다. 49개국에서 온 1500명의 선수가 전하는 도전과 극복의 스토리는 올림픽과는 또 다른 의미의 감동을 준다. 칭찬받아 마땅한 그들의 이야기가 더 많은 사람에게, 더 오랫동안 전해져 장애인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을 개선하는 데 기여하길 바란다. 제2, 제3의 석창우가 감당하기 힘든 시련과 마주했을 때 현명한 아내가 곁에 없더라도 장애인들 누구나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말이다.
 
석창우 의수화가
 
◆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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