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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의 시시각각] 누군가는 책임져야 한다

중앙일보 2018.03.15 01:45 종합 30면 지면보기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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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최흥식 금융감독원장이 물러났다. 청와대는 13일 최 원장의 사표를 수리했다. 최흥식의 금감원과 김정태의 하나금융지주 간 ‘100일 전투’는 금감원의 완패로 끝났다. 금감원은 “있을 수 없는 참사” “사상 초유의 일”이라며 부글부글 끓고 있다. 하나금융은 “우리 책임은 없다”면서도 “후환이 두렵다”고 전전긍긍이다. 예전에도 금감원과 각을 세웠던 금융회사 CEO가 꽤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한결같았다. 백전백패, 금융회사가 손을 들었다. 이번엔 반대였다. 왜 그랬을까.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그중 하나가 음모론이다.
 
과거 금융당국-금융회사의 진흙탕 싸움과 달리 이번엔 유독 음모론이 기승을 부렸다. 첫 번째 음모론은 김정태를 겨냥했다. ‘문재인 정부가 김정태를 금융 적폐로 지목했다’ ‘전 정권 실세 H·K와 친하다’부터 최순실 연루설까지 나왔다. 김정태는 이를 전임자들의 음모라며 맞받았다. 그는 기자들과 만나 “전직 임원들이 (나에 대해) 음해성 소문을 낸다고 들었다”고 했다. 김승유 전 회장과 최흥식 전 금감원장의 친분설을 흘린 것이다.
 
최 전 원장의 낙마도 음모론과 강하게 엮여 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최 전 원장의 채용 비리를 언론에 흘렸다는 것이다. 그 ‘누군가’를 금감원은 “하나은행 핵심 당사자가 아니면 누구도 알 수 없는 내용”이라며 하나금융을 적시했다. 하나금융은 "우리가 왜 자살골을 넣겠나”라며 극구 부인하고 있다. 금감원은 즉각 ‘무기한 조사’에 착수했지만 이번엔 ‘표적 조사설’에 휘말렸다.
 
음모론은 중간중간 청와대까지 등장하면서 부풀었다.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과 김승유 전 회장의 고려대 인맥 설과 김정태-문재인 대통령 친분설이 맞붙기도 했다. 김정태는 문 대통령과 경남고 동기동창이다. 경남고 동창들은 “경남고 역사상 ‘전설의 주먹’이었던 김정태와 수재 중의 수재였던 문 대통령이 서로 잘 통하는 사이였다”고 기억한다. 그렇다고 이런 관계가 김정태의 인사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게 지인들의 판단이다. 문 대통령은 동문을 잘 챙기지 않는 스타일이다. 동창인 K씨는 “(노무현 정부 민정수석 시절) 문재인에게 부탁해서 인사가 됐다는 얘기도 못 들었고, 그런 사람을 본 적도 없다”고 했다.
 
금감원은 설과 사실을 잘 구분하지 못했던 듯하다. 지난 1월 김정태의 3연임을 위한 회장추천위원회를 애초 금감원은 강력히 반대했다. 당시 금감원은 하나은행 채용 비리를 조사 중이었고 하나금융에 “조사가 끝날 때까지 회추위를 연기하라”고 압박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금감원은 슬그머니 발을 뺐고, 하나금융은 속전속결, 김정태의 3연임을 결정했다. 금융 당국 관계자는 당시 “천천히 하라는 청와대의 전언이 있었다”고 했다.
 
음모론과 친분설이 먹힌다는 건 한국 금융이 그만큼 건강하지 못하다는 증거다. 투명하지 못한 금융은 반드시 퇴보한다. 이명박 정부 때 이미 겪은 바 있다. 당시 대통령과 이런저런 연으로 얽힌 ‘4대 천황’이 거대 금융 그룹을 좌지우지했다. 금융 당국도 함부로 못했다. “대통령과 친하다”는 이유였다. ‘셀프 연임’ ‘황제 CEO’가 횡행했다. 금융계는 “그 바람에 한국 금융이 20년 후퇴했다”고 한다. 자조적인 얘기지만 ‘우간다보다 못한 수준’으로 떨어진 것도 그때다. 10년 세월이 흘렀지만 나아진 게 없다. 셀프 연임에 채용 비리까지 더해 한국 금융은 끝을 모르고 추락 중이다. 급기야 한 가닥 남아 있던 금융 당국의 권위와 신뢰마저 무너졌다. 최흥식의 사퇴만으로 끝낼 일이 아니다. 누군가는 책임져야 한다. 그가 누구이든, 누구와 친하든.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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