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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경 칼럼] 당신은 안희정 조민기를 욕할 자격이 없다

중앙일보 2018.03.12 01:30 종합 35면 지면보기
이하경 주필

이하경 주필

독일에서는 교통 단속 경찰관이 미혼모에게 유독 관대하다. 유학 시절을 이곳에서 보낸 이성낙 전 연세대 의대 교수는 “교통위반자가 미혼모라는 사실을 확인하면 ‘오 싱글맘!(Alleinerziehende Mutter!)’이라면서 바로 보내준다”고 했다. 홀로 아이를 키우는 여성에 대한 따뜻한 배려이자 경의의 표시다. 싱글맘을 포함한 모든 여성을 끝없이 차별하고 무시하는 한국과 얼마나 다른가.
 

미투! 미움·개탄만으론 성공 못해
‘내가 차별·증오 괴물… ’ 고백하고
싸우지 않고 함께 살자고 외쳐야
미투 계속돼야 … 피란민 심리 No!

“나도 당했다”는 여성들의 미투(#MeToo) 운동이 거세다. 유력한 차기 대선주자인 안희정 충남지사가 물러나고 더불어민주당 민병두 의원이 사퇴 의사를 밝혔다. 탤런트 조민기씨는 목숨을 끊었다. 여성에 대한 인식 전환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다행이다.
 
미투 운동을 계기로 양성평등적 사회가 실현되고 세상이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 있을까. 낙관은 금물이다. 모든 사회적 약자, 싱글맘·장애인·소수자·비정규직·저소득층·저학력자를 차별하고 무시하는 구조와 차가운 시선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 억압과 폭력은 이 거대한 차별 구조에서 나오는데, 미투만으론 해결할 수 없는 버거운 숙제다. 청소노동자·골프장 캐디 등 유명인이 아닌 여성들은 성폭력을 겪고 있지만 미투를 엄두도 못 내고 있지 않은가. 미투의 대상인 권력형 성폭력은 표면상 남녀의 문제이지만 본질은 권력관계를 바탕으로 한 부당한 억압과 폭력이다. 뿌리에는 차별과 탐욕, 증오와 적대라는 악마적 심리구조가 도사리고 있다. 약자는 무시해도 된다. 네가 억울하든 말든 내 욕망만 채우면 될 뿐이라는 횡포를 어찌할 것인가.
 
문제는 우리 모두가 일상 속에서 악마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나와는 무관한 것처럼 폭로의 대상이 된 사람의 부도덕성을 정죄하고, 즐겁게 개탄한다. 그러면서 지금 이 순간에도 크고 작은 권력을 무기로 약자의 자발적 헌신과 복종으로 포장된 악행을 저지르거나 방관하고 있다. 너나 없이 위선자고 공범이다.
 
이하경칼럼

이하경칼럼

이 나라의 부모들은 눈만 뜨면 내 자식에게 무조건 싸워서 이기라고 가르친다. 세상은 은메달, 2등은 기억하지 않는다고 속삭인다. 경쟁과 성공이 나란히 최고의 가치로 버티고 있는 지구상 유일의 나라가 한국이다. 악착같이 좋은 대학 나와서 좋은 직장 취직해야 어깨 쭉 펴고 다닌다. 이렇게 해서 전 국민의 1%만 의기양양하고 나머지는 죄가 없어도 고개 숙여야 하는 코미디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그뿐인가. 내 자식 위해서는 위장전입을 밥먹듯 하면서 장애인학교가 들어오겠다고 하면 아파트값 떨어진다고 펄쩍 뛴다. 문명사회 공동체의 운영에 필수적인 이타심과 최소한의 염치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다. 이러니 사회적 약자인 여성에 대한 권력형 성폭력에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게 된다. 미투를 진짜로 성공시키려면 정의의 여신이 이 대책 없는 괴물들부터 먼저 단죄해야 할 것이다.
 
니체는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차별과 탐욕이라는 거대한 괴물을 미워하고 맞서 싸운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괴물이 돼버렸다. 용서받기 힘든 괴물이 된 변명거리를 굳이 찾는다면 동족 간 전쟁을 치렀기 때문일 것이다. 좁은 땅덩어리에서 형제에게 총부리를 들이댔던 후유증과 독소는 고스란히 오장육부에 DNA로 박혔다. 내가 살기 위해서 너를 죽여야 했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했다. 이건 전쟁터와 피란지에서의 생존수칙이었고, 정의와 윤리는 변기 속 오물이 됐다.
 
이 나라에서는 아무리 근사한 법을 만들어도 잘 지켜지지 않는다. 아직도 피란민 시절의 기회주의적 심리상태가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1년에 24만 건, 2분에 한 건꼴로 사기 사건이 발생하는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니다. 김웅 인천지검 공안부장은 이런 한국을 ‘사기 공화국’이라고 규정하고 “사회 전체에 세속적인 욕망이 창세기 바다처럼 들끓고 있다”고 일갈한다.(『검사내전』 부키)
 
적대와 편법의 DNA는 오장육부에 이어 마침내 미세혈관까지 점령해 인간다움의 증거인 관용·연대·평등을 조롱하고 있다. 그렇기에 북핵의 완전 폐기와 휴전체제의 평화체제로의 전환은 포기할 수 없는 과제다. 편법·탈법·차별·억압·폭력을 정당화하는 심리적 전쟁과 피란민 의식을 끌어안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이 없는 세상을 향한 미투는 더 치열하게 계속돼야 한다. 동시에 내 마음과 일상 속에서 차별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부끄러운 전쟁이 벌어지고 있음을 솔직히 인정하고, 평화를 회복하자고 외치는 미투도 필요하다. 당신은 할 수 있는가. 결단할 수 없다면 안희정과 조민기를 욕할 자격이 없다.
 
이하경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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