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삼성동 봉은사의 판전 현판. 추사 김정희의 마지막 글씨로 알려졌다.
an die musik: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시게티
한승원의 장편소설 『추사』는 판전 글씨를 쓰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김정희는 봉은사 주지의 간청을 받아들여 절에 머물며 현판을 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단 두 글자를 쉽게 쓰지 못한다. 어떤 모양새로 써야 할까, 예서로 써야 하나, 전서로 써야하나. 평생 글씨를 써온 동북아 최고의 명필은 갈피를 잡지 못한다. 삶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며 추사는 일생에서 가장 소박하고 향기로운 보석을 만들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럴수록 머리는 복잡하고 눈앞은 흐릿해진다.
추사는 꿈을 꾼다. 골짜기의 짙푸른 소(沼)에 한 소년이 앉아 붓을 들고 글씨를 쓰고 있다. 소년 앞에는 종이가 없다. 그는 거울처럼 맑은 수면 위에 글씨를 쓴다. 소박하고 고졸한 글씨는 놀랍게도 물 위에서 풀어지지 않는다. 소년은 추사에게 붓을 건넨다. 추사는 붓을 들고 앉았지만 팔목엔 힘이 없다. 물에다가 어떻게 글씨를 쓴단 말인가. 추사는 붓을 물 위로 가져가 가로획 하나를 그었지만 먹물은 흩어질 뿐이다. 소년이 말했다. “두려워하고 주저하는 것이 글씨를 망칩니다. 오랫동안 마음으로 닦아온 글자들을 자신 있게, 금시조가 해룡을 대번에 훔쳐 잡듯 써야 합니다.”
추사는 눈을 번쩍 떴다. 꿈은 계시다. 촛불을 켜고 먹을 갈았다. 가부좌를 틀고 소년이 썼던 글씨를 떠올렸다. 그것은 전서도 아니고 해서도 아니었다. 아이가 아무런 마음 없이 쓴 글씨였다. 추사는 붓을 들고 거침없이 획을 그었다. 板, 殿. 마지막 파임을 긋자 온 몸에 회오리 같은 환희심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붓을 놓자 곧 의식이 흐려졌다.
요제프 시게티의 연주를 들으면 판전 두 글자가 떠오른다. 그가 연주한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을 처음 듣고 놀랐다. ‘그렇게 유명한 연주가 이렇게 서툴다니.’ 헨릭 쉐링처럼 구조가 견실하지도 않고 그뤼미오처럼 유려하지도 않았다. 울퉁불퉁한 판전처럼 비틀비틀한 시게티의 연주는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연주는 들을수록 빠져든다. 흔들리는 촛불처럼, 아버지가 몰래 손을 놓은 자전거처럼 위태위태하지만 결코 쓰러지지 않는 소리는 묘한 매력이 있다.
시게티의 연주를 즉물주의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낭만성 짙은 표현주의를 버리고 음표대로, 객관적으로 연주하는 경향을 말한다. 하지만 결국 아이의 마음처럼 꾸밈없이 연주한다는 뜻이다.
최근 구한 시게티의 옛 음반에 드뷔시의 ‘달빛’이 실려 있다. 즉물적 연주자와 탐미적 음악이 어울리겠나 생각했는데 맘에 쏙 든다. 시게티가 비추는 달빛은 담담하다. 오이스트라흐의 감미로운 바이올린 달빛, 조성진의 촉촉한 피아노 달빛보다 자주 손길이 간다. 추사의 글씨 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인상을 주는 것은 아이가 몽당연필로 쓴 것 같은 ‘판전’이다.
글 최정동 기자 choi.jeongdong@joongang.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