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노트북을 열며] ‘성폭력 본능’은 없다

중앙일보 2018.03.09 01:24 종합 34면 지면보기
김한별 디지털콘텐트랩장

김한별 디지털콘텐트랩장

들불 같은 ‘미투(#MeToo)’ 고백 와중에 어이없는 돌출 발언이 이어지고 있다. “앞으로 미투 운동을 공작에 이용하려는 움직임이 있을 것”이라는 방송인 김어준의 ‘예언’이 그랬고, 최근 차명진 전 자유한국당 의원이 라디오에서 한 얘기가 그랬다.
 
차 전 의원은 “인간의 유전자를 보면 남자, 수컷은 많은 곳에 씨를 심으려 하는 본능이 있다”며 “남성의 본능이 그렇다는 것은 진화론으로 입증돼 있다. 다만 문화를 갖고 있는 인간이라 (그 본능을) 제어하고 통제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차 전 의원이 가해자들을 옹호한 건 아니다. 그는 “권력을 이용해 인간의 신체에 위해를 가하는 문제를 해소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미투 문제를 성 상품화나 강간 문제와 구분해야 한다며 ‘남성의 본능’ 얘기를 꺼냈다.
 
그의 말은 얼핏 그럴듯하게 들린다. 『인류의 기원』 저자인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리버사이드) 이상희 교수는 “유전자를 많이 남기는 것이 진화론의 입장에서 유익하다는 명제 자체는 맞다”고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이 교수는 “성추행·성희롱·성폭행·성폭력·강간은 유전자를 많이 남기는 일이 아니다. 씨를 뿌리는 일도 아니다. 성추행·성희롱·성폭행·성폭력·강간의 결과로 설사 임신이 되고 아이가 태어난다고 해도 이는 진화론에서 이야기하는 생식 행위라기보다는 사회학·인류학에서 이야기하는 권력에 의한 폭력”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남성의 본능’이 “절대로 진화론으로 입증돼 있지 않다”는 것이다.
 
차 전 의원과 비슷한 주장을 한 학자들이 없었던 건 아니다. 2000년 출간된 『강간의 자연사(A Natural History of Rape)』 공저자인 뉴멕시코대 랜디 손힐(생물학) 교수와 콜로라도대 크레이그 파머(인류학) 교수가 대표적이다. 두 사람은 강간을 옹호하진 않았지만 ‘자연적’인 일로 봤다. ‘남성이 생식 성공 확률을 높이기 위해 적응한 결과’(손힐) 혹은 ‘지나친 성욕의 부산물’(파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은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못했다. 여성계는 물론 진화생물학계 내부에서도 근거가 부족한 허술한 가설이라고 비판받았다. 차 전 의원과 손힐·파머 교수의 논리대로라면 모든 남성은 ‘잠재적 강간범’이 된다. 미투 가해자들의 잘못도 ‘(본능을 억누르지 못한) 자제력 부족’으로 축소된다.
 
진화론은 과학이다. 과학의 권위를 빌릴 땐 조심해야 한다. 자칫 잘못된 믿음으로 여론을 오도(誤導)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어설픈 ‘훈장질’이 아니라 경청이다. 피해자들의 참혹한 증언을 새겨듣고 가해자들의 죗값을 물어야 한다. 그게 터무니없는 ‘괴물’을 길러낸 우리 사회가 뒤늦게라도 책임을 다하는 길이라고 믿는다.
 
김한별 디지털콘텐트랩장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