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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 폭로장 된 한국…판도라 상자에 남은 건?

중앙일보 2018.03.09 01:02
[더,오래] 손민원의 성·인권 이야기(4)
그리스신화를 보면 제우스는 신들을 총동원해 인류 최초의 여자 ‘판도라’를 만들었다. 제우스는 판도라에게 상자 하나를 선물하고 절대 열어보지 말 것을 충고한다. 그러나 판도라는 호기심에 뚜껑을 열어보게 되고, 그 안에 담긴 추악한 것들이 인간 세상에 쏟아져 나온다. 이미 세상은 고통과 불행으로 가득하고, 그 안에 남겨진 것은 단 하나 ‘희망’이라는 단어뿐이다.  
 
안희정 충남지사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 [페이스북 캡처]

안희정 충남지사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 [페이스북 캡처]

 
요즘 대한민국은 판도라의 상자에서 쏟아져 나오듯 추악한 성폭력 폭로의 장이 되었다. 계속되는 폭로에 이젠 놀랍지도 않다고들 말한다. 정치판에도 분명 성폭력 가해자가 많을 것이라고 진작 예상했지만 ‘미투 보도에 안희정이 나올 줄이야’라는 반응이다. 
 
그가 성폭력 가해자라는 사실에 국민의 배신감은 말할 수 없이 크다. 평상시 보편적 인권의 가치를 중요시하는 사람이고, 권력자보다는 약자의 시선을 가지려 한다고 생각했던 정치인의 가치철학이 모두가 허위인 두 얼굴의 사람이었다니…. 밤잠을 설칠 정도로 분노를 감출 수 없다.
 
“설마 그가”…두 얼굴의 정치인에 분노 
언제쯤이나 돼야 성별 권력관계 속에서 억압받지 않는 성적으로 평등한 관계로 남녀가 상생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여성들이 성적인 대상인 아닌 ‘주체적 인간’으로 살 수 있을까?  
 
일상 속에서 크고 작은 성적 희롱과 추행이 발생되고 있다. [중앙포토]

일상 속에서 크고 작은 성적 희롱과 추행이 발생되고 있다. [중앙포토]

 
나의 오늘과 내일을 통제할 수 있는 권력관계 속에서 성폭력은 발생한다. TV에서 이슈가 되는 성폭력도 있지만, ‘이건 폭력이야’라고 떠들 수 없을 만큼 문제조차 되지 않은 작은 성적 희롱과 추행을 우리는 일상에서 만난다. 그러나 이 작은 문제들은 당연히 큰 성폭력을 허용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지난주 강남의 한 식당에서 친구들을 만났다. 중국식 샤부샤부 요리인 ‘훠궈 ’요릿집이었다. 그런데 너무 놀라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얇은 쇠고기 옷을 입은 바비인형이 등장한다. 먹는 사람들은 바비의 쇠고기 옷을 한겹 한겹 벗기면서 훠궈를 즐긴다. 결국 날씬함의 대명사인 바비의 알몸이 드러난다. 
 
사람들은 무척 즐거워하면서 쇠고기 옷을 입은 바비와 벗겨진 바비를 보며 사진을 찍어댄다. 여성의 몸이 상품화된 경우지만 대부분은 여기서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매체에서 늘 접하는 일상이 된 문화이니까.
 
사람의 신체를 인격적으로 배제하거나 분리한 채 성적 욕구를 채워주는 대상으로만 간주하는 사고를 ‘성적 대상화’라고 한다. 벗겨지는 것은 여성의 몸이고, 여성의 몸은 상품으로 취급된다. 성적 대상화가 된 여성은 ‘인간 대 인간’이 아니라 남성의 우월감을 표출시킬 수도 있고, 원할 때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성적 대상이 된다. 전통적으로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 사상이 유지된 사회에선 성적 대상화가 너무나 익숙하고 깊게 뿌리박혀 있다.
 
'슴만튀', '엉만튀' 등 성추행을 놀이문화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신조어가 생겨나고 있다. [중앙포토]

'슴만튀', '엉만튀' 등 성추행을 놀이문화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신조어가 생겨나고 있다. [중앙포토]

 
요즘 들을 수 있는 말 중 ‘슴만튀’ ‘엉만튀’라는 단어가 있다. ‘가슴을 만지고 튄다’ ‘엉덩이를 만지고 튄다’는 뜻을 담고 있는 신조어다. 100만여 시민이 촛불을 들었던 2016년 겨울의 광화문광장은 평화의 시위만 존재한 것이 아니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추행당한 곳이었고, ‘못생긴 시위녀’란 몰카의 대상이 되기도 한 장소였다.
 
성적인 괴롭힘은 어디서든 교묘하게 불특정 다수에게 벌어지고 있다. 내가 만난 학생 중 일부는 ‘슴만튀’ ‘엉만튀’가 분명 성추행인데 이를 놀이문화처럼 생각하고 자신의 성공 경험을 자랑스럽게 떠들었다.  ‘기습 성추행’을 경험한 피해자 대부분은 그 순간 너무 놀라고 당황스러워 몸이 ‘얼음’이 돼버린다. 어떤 행동도 할 수 없고, 시간이 흐른 뒤 마음을 가라앉혀서야 그로 인한 충격, 분노와 공포심이 남게 된다고 경험담을 말한다.
 
대학가를 파고드는 성폭력 언어들 
한 대학의 졸업식장. 학교에 들어서니 총대의원회에서 준비한 큰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그 플래카드에는 ‘축 졸업’이라 씌어 있었다. 그런데 ‘축 졸업’이란 단어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여성의 신체적 특성을 비하하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이 플래카드에 대한 불쾌감을 표현하고 항의했을 때 총대의원회는 “조금 색다르고 재미있게 제작해 보고자 했다”고 해명했다.
 
‘색다르고 재미있게’ ‘격려였다’ ‘딸 같아서’ ‘술에 취해서’ 등이 가해자들의 해명이다. 해명의 매뉴얼이 어디 있는가 싶은 정도다.
 
여러 대학에서 계속해 문제가 되는 단톡방 사건은 대학가뿐 아니라 대기업, 기자 집단에서도 대화 내용이 공개되면서 문제가 되고 있다. 남성 집단의 단톡방 대화를 보면 공통으로 동기 여학생, 과외 학생, 미팅에서 만난 여학생과 직장 동료 등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가 이뤄졌다. 대화 속에서 같은 반 동기를 몰래 촬영한 사진을 올리는가 하면 ‘배고프다’는 말에 ‘○○(동기 여학생 이름) 먹어’라고 답하는 등과 같이 공부하는 친구, 직장의 동료를 성적 소모 대상으로 보았다.
 
지난 2017년 8월, 인하대 의예과 성희롱 사건을 알리는 대자보가 붙었다. [연합뉴스]

지난 2017년 8월, 인하대 의예과 성희롱 사건을 알리는 대자보가 붙었다. [연합뉴스]

 
매일 얼굴을 보며 공부하는 친구들을 대상으로 1년 넘게 성적 대상화를 하고 성희롱을 한 것이다. 밝혀지기 전까지는 그 공간의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그들만의 비밀스러운 공간에서 동조하면서 서로의 친밀감을 공고하게 다지고 있었다.
 
왜곡된 성 문화는 고스란히 초등·중학교에서도 그대로 노출된다. 외모 비하 표현인 ‘니 얼굴 실화냐’, 성적 맥락으로 통용되는 ‘기모치’(기분 좋아)와 ‘야마테(그만)’, 부모님을 욕하는 등의 패륜적 놀림말인 ‘패드립’ ‘네미’ ‘니에미’ ‘엠창’ 같은 말이 그저 재미로 일상어가 돼버렸고, 이 말뜻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사용하는 아이가 많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몇 가지 사례에서 보듯 현재 한국 사회에서 여성은 성적 대상화 객체로 등장한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왜곡된 성문화는 한국 사회를 강간이 허용되는 사회로 만들고 있다. 성문화는 성폭력과 무관하지 않다.  


왜곡된 성문화 언제 바뀌나? 
지난 19일 공개 사과 기자회견 자리에 선 연출가 이윤택씨. 그의 성범죄를 증언하는 ‘미투(#MeToo)’가 이어지는 가운데, 21일에는 연희단거리패 오동식 배우가 이씨의 ‘기자회견 리허설’을 폭로했다. [뉴스1]

지난 19일 공개 사과 기자회견 자리에 선 연출가 이윤택씨. 그의 성범죄를 증언하는 ‘미투(#MeToo)’가 이어지는 가운데, 21일에는 연희단거리패 오동식 배우가 이씨의 ‘기자회견 리허설’을 폭로했다. [뉴스1]

 
이윤택 같은 괴물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등장하는 것일까? 아니다. 패륜적 농담이 난무하고, 친구를 거리낌 없이 성적 대상화 하는 성차별적 문화가 비판 없이 수용되고 소비되는 사회에서는 괴물이 끊임없이 등장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입에서는 ‘그저 관습이었다’ ‘미안하다 괘념치 마라. 다 잊어라.’라는 변명만이 나올 것이다.
 
이제 우리는 과거의 아픔을 폭로하는 것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괴물을 양산해내는 이 성차별적 문화를 끊어버려야 하는 중요한 시점을 맞이하고 있다. “나는 오늘 무엇을 할 것인가? 나도 이 성차별 문화에 동조하고 묵인하면서 살고 있지 않은가?” 반성과 학습이 필요할 때다.
 
판도라의 상자 안에는 희망이라는 단어가 남아 있다. 변화의 시점인 지금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상자 안의 희망은 희망으로 나아갈 수도 있고, 또다시 성차별적이고 왜곡된 성문화 속에서 또 다른 괴물이 탄생하는 절망을 만들 수도 있다.
 
손민원 성·인권 강사 qlover@naver.com

 

비트코인의 탄생과 정체를 파헤치는 세계 최초의 소설. 금~일 주말동안 매일 1회분 중앙일보 더,오래에서 연재합니다. 웹소설 비트코인 사이트 (http://news.joins.com/issueSeries/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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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원 손민원 성ㆍ인권 강사 필진

[손민원의 성·인권이야기] 세상에는 너무나 다양한 사람이 있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젊은이와 노약자. 비장애인과 장애인. 남자와 여자..... 모두 다른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이들의 인권 이야기, 폭력예방, 성평등.... 교육을 통해, 나와 이웃 모든 사람이 가진 자유, 평등, 존엄에 대해 공감하는 힘을 키우기를 소망합니다. 강의 현장에서 만나는 다양한 목소리를 글을 통해 나누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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