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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이주열 총재, 셰익스피어를 닮아야 한다

중앙일보 2018.03.03 01:10 종합 27면 지면보기
김형태 서울대 경영대 객원교수· 전 자본시장연구원장

김형태 서울대 경영대 객원교수· 전 자본시장연구원장

셰익스피어가 위대한 이유는 무엇일까. 상상력, 표현력, 감정의 폭과 깊이 모두 탁월했지만 그것이 그를 위대하게 만든 자질은 아니었다. 19세기 영국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John Keats)의 말을 빌리자면 셰익스피어를 위대하게 만든 것은 “애매모호함에 대한 수용력”이다. 웬만한 작가 같으면 벌써 이렇게 또는 저렇게 “과감한” 결론을 냈을 텐데 셰익스피어는 달랐다. 스토리의 애매모호함을 끈질기게 참아내며 끊임없이 첨가된 새로운 스토리가 전체 스토리를 풀어 가도록 만들었다.
 

애매모호함에 대한 수용력이란
해석하기 힘든 신호가 왔을 때,
모순적 신호가 공존할 때,
셰익스피어처럼 모든 가능성
열어놓고 뇌에 담아두는 능력
이 총재는 애매모호함의 바다에서
통화정책 끌고 가야 할 선장이다

애매모호함에 대한 수용력은 불확실한 상황에서 조급하게 결론 내지 않고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애매모호함을 견뎌 내는 능력이다. 특별한 형태의 인내력인데 IQ로는 측정이 안 된다. 우유부단과는 차원이 다른 개념이다. 과감함이란 미명하에 수행되는 조급한 판단과 끝내기 욕구는 애매모호한 상황에선 오히려 단점이다. 시장에서 각광받는 수퍼예측자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탁월한 점은 IQ도 아니고 정교한 계량모형도 아니다. 해석하기 정말 힘든 신호가 왔을 때, 모순적 신호가 공존할 때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뇌에 담아 두는 능력이다.
 
미국 신임 연준 의장의 역할은 명확하다. 경제위기 이후 풀린 4조5000억 달러의 돈을 시장 충격 없이 거둬 들이는 것이다. 기축통화국이니 다른 나라 통화정책을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우리는 사정이 다르다. 통화정책 차원에서 조작당할 순 있어도 남을 조작하긴 힘들다. 게다가 현 경제상황은 애매모호함 그 자체다. 한은 총재가 희미한 신호를 예민한 촉으로 파악하고, 모순적인 상황을 항상 뇌 속에 넣고 견뎌야 하는 이유다. 이런 점에서 한은 총재는 미 연준 의장보다 IQ도 높아야 하지만 촉의 예민함도 커야 하고 특히 애매모호함에 대한 수용력이 커야 한다.
 
중앙시평 3/3

중앙시평 3/3

한국 경제의 현 상황은 실로 애매모호함의 정수다. 세계경기 회복에 힘입어 수출이 잘된다. 성장률도 괜찮다. 수출품목을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반도체가 수출을 주도할 뿐 철강·자동차·조선 등 전통적 강자는 힘을 못 쓴다. 수출이 증가해 국내총생산(GDP) 성장을 이끌었지만 반도체에 집중돼 있으니 고용과 가계소득이 늘지 않는다. 소비도 늘지 않는다. 그래서 성장은 하는데 물가는 오르지 않는다. 아궁이에 불을 집히는데 방이 따뜻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경기가 회복 국면에 들어선 것 같기는 한데 여전히 혼란스럽다. 재닛 옐런이 연준을 떠나며 말했듯 통화정책이 이젠 소득불평등까지도 고려해야 한다. 성장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역시 통화정책에 애매모호함을 더한다. 오히려 폭풍우로 배가 침몰할 때엔 선장의 역할이 분명하다. 상황이 쉽다는 말이 아니라 의사결정 방향이 명확하단 말이다. 수출이 지속적으로 좋을지, 가계부채와 부동산경기는 어떨지, 최저임금 인상의 효과는 어떨지, 빈부격차가 성장의 발목을 잡지는 않을지, 미국의 보호무역주의가 시스템 위험으로 작용하지 않을지 통화정책에서 고려해야 할 변수가 너무 많아졌다. 더욱이 이들 변수가 보내는 신호는 애매모호함 그 자체다. 어찌 보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한은 총재의 고려 대상이 돼야 한다. 영국은행의 수석이코노미스트이자 금융정책위원회 위원인 앤드루 홀데인(Andrew Haldane)이 말한 것처럼 중앙은행 총재는 경제를 냄새 맡고 보고 듣고 맛볼 수 있어야 한다. 통화정책에 익숙하고 정치적으로 독립적이고 국제금융에 익숙하고 시장과 잘 소통해야 하는 것은 경제를 잘 보고 듣고 냄새 맡기 위해 당연히 갖춰야 할 조건이다.
 
한국의 경제와 통화정책을 이끌어 갈 새 선장으로 이주열 총재가 연임됐다. 김유택·김성환 총재 이후 역사상 세 번째다. 한국 경제는 미국과 달리 경기회복 신호가 분명하지 않고 강력하지도 못하다. 이주열 총재의 다음 임기 동안엔 모순된 신호가 범람할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정부는 애매모호함을 싫어하니 빨리 포지션 잡으라고 압력을 가할 수도 있다. 연임된 총재에 대해선 그만큼 국민의 기대도 크다. 당연히 책임감과 부담도 크다. 모순과 혼란이 모든 감각을 뒤덮을 때, 긴장감과 부담감이 심장을 조여 올 때 뇌의 수용력은 소진되기 마련이다. 뇌가 소진되면 듣고 싶은 정보만 듣고 서둘러 상황을 판단해 종결해 버리기 쉽다. 한은 총재에게 우직한 결단력이 요구되던 시대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과감한 결단보다 애매모호함을 견뎌 내는 것이 훨씬 더 힘들다. 더 큰 내공을 요구한다. 이주열 총재가 셰익스피어를 닮아야 하는 이유다.
 
김형태 서울대 경영대 객원교수·전 자본시장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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