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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여성감독은 왜 대작영화 못만드나

중앙일보 2018.03.03 00:02 종합 20면 지면보기
여자들의 무질서

여자들의 무질서

여자들의 무질서
캐롤 페이트먼 지음

세상을 뒤흔드는 ‘미투’ 열풍
여성의 ‘노’를 ‘예스’로 오해 말아야
남성과 자본의 폭력사 꼼꼼히 짚어

새로운 각성 필요한 페미니즘
여주인공 영화 등 소비에만 주력
현대사회 불평등 구조에 눈떠야

이평화·이성민 옮김, b
 
페미니즘을 팝니다
앤디 자이슬러 지음
안진이 옮김, 세종서적
 
여성들의 성폭력 피해 사실을 공개하는 미투(#me too, 나도 당했다) 운동이 연일 새로운 이름들을 호명하고 있다. 이러한 와중에 영국의 정치학자 캐롤 페이트먼의 1989년작 『여자들의 무질서』가 번역·발간되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평등과 자유를 중시하는 민주주의가 어떻게 여성을 은폐시키고 축소시켰는가를 다루는 그녀의 논쟁이 시급하다는 뜻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한편 미국의 문화평론가 앤디 자이슬러의 『페미니즘을 팝니다』는 일종의 경고로서 유의미하다. 1995년 페미니즘 잡지 ‘비치(Bitch)’를 공동창간한 그는 페미니즘이 전 세계의 화두로 떠오른 지금, 자본의 맥락에서 현재를 진단하고 경고한다. 자본이 페미니즘에 동의하는 제스처를 취하면서 어떻게 여성을 배제하는지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
 
페미니즘을 팝니다

페미니즘을 팝니다

자이슬러에 따르면, 영화 제작자나 투자자들은 여성 감독에게 대작을 맡기기를 꺼려한다. 여성감독의 성공은 예외적인 것으로 취급되고, 남성감독의 성공은 자연스러운 것이라서 자본은 남성감독의 작품에 대거 투입된다. 때문에 여성감독의 성공은 일회적인 것에 그칠 공산이 크다. 작품의 성공이 그녀의 성공으로 이어지지 않고, 그녀의 세계를 정당화하는데 어떤 기여도 할 수 없게 만든다. 이 같은 부조리는 영화사의 고위직 임원들이 대개 남성인 탓이 크다. 그들은 남자들의 이야기에 더 크게 공감할 수밖에 없고 자신들을 긍정적으로 투사할 수 있는 영화에 돈을 쏟는다. 그들은 여성 이야기의 공감대가 보편적이라는 사실을 믿으려 들지 않는다. 그 결과 영화산업 내에서 여성이 어떠한 대접을 받았는가는 이제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비단 영화산업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다.
 
『여자들의 무질서』는 여성의 말이 무시되는 상황을 문제시한다. 민주주의는 시민의 말에 크게 의존한다. 의사 표현의 도구가 말이기 때문이고, 시민의 동의 아래 정치시스템이 운용된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자들의 말은 무시되거나 오독되기 십상이다. 빈번한 성폭력이 그 증거이다. 가해자들은 여성의 ‘NO’를 부정이나 거절의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받아들였다면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대립 구조로 남성과 여성이 충돌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폭로되는 일련의 사건에서도 확인되듯, 가해자들은 여성을 오로지 동의하고 찬성하는 존재로 취급했다. 여성을 굴복시키고 두려움을 심었다. 강요된 복종을 자발적 동의라고 오인하면서 폭력을 친밀한 관계에서 일어날 법한 일로 재정의한 결과가 지금의 성추문들이다.
 
자본은 페미니즘도 상품화한다. 지난해 크리스찬 디올 패션쇼에 등장한 티셔츠.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문구가 찍혀 있다. [사진 디올]

자본은 페미니즘도 상품화한다. 지난해 크리스찬 디올 패션쇼에 등장한 티셔츠.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문구가 찍혀 있다. [사진 디올]

페이트먼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이 가능했던 이유를 정치이론의 발전 과정에서 찾는다. 17세기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시작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정치적 논의에서 여성은 계속 배제되었다. 이유는 간단한다. 여성은 국가를 방어하고 유지하는 정치적 임무를 맡기에 생리적으로 무력한 반면 남성은 훨씬 강하고 우월한 존재라서 정치적 영역에 반드시 필요했다. 국가에 대한 시민의 의무를 군인의 임무와 유사하게 인식한 탓이다. 지난 몇 세기 동안 그 전제는 유물처럼 전해 내려왔다.
 
남성이 공적 언어와 민주주의를 독점하는 동안, 평등과 자유의 가치는 희미해지고 개인의 위상이 두드러지게 됐다. 개인의 사적 욕망이 공적 영역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자본이 그런 흐름을 부채질했다. 사회의 모든 공적인 영역에서 여성에 대한 불평등과 폭력이 버젓이 이루어졌으며, 사적 이윤 추구가 자본 경제 제1의 목표가 되었다. 『여자들의 무질서』와 『페미니즘을 팝니다』는 이 지점에서 만난다. 자이슬러는 페미니즘 역시 이러한 메커니즘에서 아주 자유롭진 않다고 진단한다. 자본에 활용당했다는 얘기다. 기업은 페미니즘의 상품화를 주도해 소비자로서의 여성을 우대할 뿐, 경제적 주체로서 여성의 지위나 영역에 대해선 고민하지 않는다. 페미니즘이라는 트렌드에 발맞추기 위해 여주인공이 등장할 뿐인 영화를 추천하고, 페미니스트라고 적힌 명품 티셔츠를 판매한다.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밝힌 연예인들을 브랜드화하려는 거대 자본의 행보는 전 세계 여성들이 직면한 실제적인 불평등을 외면하고, 성폭력과 성적 차별에 대한 대화를 뒷전으로 미루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평등은 실패할 권리를 보장하며, 자유는 선택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여자들의 무질서』를 읽고 나서 문득 이런 문장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져 얼마든지 또다시 도전할 수 있다면 우리는 마음 놓고 한두 번쯤 실패할 수 있지 않을까. 평등과 자유가 인간적인 삶에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한 우리는 모두 정치적 인간일 수밖에 없다. 누구에게나 발언의 자유가 있다는 주장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불편할 것이다.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 시스템 속에서 사는 우리는 실은 그러한 이상적인 민주주의에 도달한 적이 없다. 두 저자가 말하는 성 평등은 모두가 귀중하게 다루어지는 것을 의미할 뿐, 여성의 우대를 원하지 않는다. 원치 않음, 거절, 동의하지 않음의 언어인 ‘NO’. 그 목소리에 먼저 동의하길 바란다. 두 책의 저자가 요구하는 첫 번째 실천이다.
 
황현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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