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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의 퍼스펙티브] 평창 이후, 문 대통령이 ‘핵메달’ 딸 차례다

중앙일보 2018.03.01 00:02 종합 23면 지면보기
올림픽 이후 한반도
아돌프 히틀러가 다른 귀빈들보다 한 계단 높은 특석(box seat)에서 일어나 개회를 선언했다. 평화를 상징하는 2만5000마리의 비둘기가 날아올라 올림픽 스타디움 상공을 선회했다. 축포가 터졌다. 놀란 비둘기들이 일제히 분비물을 내리쏟았다. 비둘기 분비물은 신사들의 모자와 숙녀들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

북핵이라는 현실 여전한 상황에서
대통령은 북한의 북미대화 용의와
미의 적절한 조건 간 거리 좁히고
접점 찾아야 하는 무거운 짐 안아

북한에게서 비핵화 의지 약속받고
미의 대북 적대정책 변화 유도해
평창의 씨앗을 평화의 거목으로
키우는 게 대통령의 역사적 과제

 
1936년 8월 1일 제11회 베를린여름올림픽은 ‘평화’의 이름을 달고 이렇게 개막됐다. 최초의 성화 릴레이 봉송, 최초의 텔레비전 중계의 기록을 세운 기념할만한 올림픽이었다. 한국인들에게는 손기정의 마라톤 제패, 남승룡의 동메달로 기억되는 올림픽이다.
 
히틀러는 “올림픽이 모든 나라를 평화의 정신으로 하나로 묶는다”고 외쳤다. 3년 전 바이마르공화국을 무너뜨리고 권력을 잡은 나치 당수 히틀러의, 비둘기로 형상화된 평화의 올리브 가지가 위장된 것이었음은 그 뒤의 역사가 증명한다. 히틀러는 평화 행사로 위장된 올림픽을 독일 민족의 우수성을 과시하는 무대로 만들고 싶었다. 그는 유대인·집시·흑인 선수의 올림픽 참가를 금지하고 제한했다.
 
올림픽을 전후해 히틀러는 2차 세계대전을 종결하는 베르사유 체제를 하나씩 허물어 나갔다. 그는 올림픽이 열리기 5개월 전에는 베르사유 조약으로 독일군의 진입이 금지된 비무장지대 라인란트를 점령했다. 올림픽을 치른 2년 뒤에는 1차 대전에 대한 유럽 국가들의 트라우마를 자극해 주민의 다수가 독일계인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 주를 독일 영토에 편입했다.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 이탈리아 총리 베니토 무솔리니, 프랑스 총리 에두아르 달라디에가 서명한 악명 높은 뮌헨조약의 형식을 빌려서다.
 
‘묻지마 평화주의’는 위험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체임벌린은 뮌헨조약 서명 후 귀국 제1성으로 “명예로운 평화를 가지고 왔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평화라고 믿는다”라고 말해 뒷날 세상의 조롱거리가 됐다. 히틀러는 비행기를 만들고 전함과 잠수함을 건조하고 제3제국의 국방력을 강화해 나갔다. 1938년에는 오스트리아를 합병했다. 마침내 1939년 9월 폴란드, 1940년 프랑스를 침공해 2차 대전의 전단(戰端)을 열었다. 영국에서는 체임벌린 내각이 사퇴하고 윈스턴 처칠의 전시내각이 구성되었다. 체임벌린으로 상징되는 유화정책은 맹목적 주전론(jingoism) 못지않게 힘의 뒷받침 없는 묻지마 평화주의가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한 역사적 교훈을 남겼다.
 
히틀러의 베를린올림픽에서 82년의 시차와 8240㎞의 거리를 두고 평화를 지향하는 평창겨울올림픽이 열렸다. 1936년 베를린 이후 이같이 정치색이 짙은 올림픽은 처음이다. 두 개의 올림픽은 전쟁과 평화의 갈림길에서 열렸다는 공통점이 있다. 북한의 존재감은 주최국 한국의 그것을 능가했다. 북한이 보낸 선수는 12명의 작은 규모였다. 그러나 북한의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은 500명에 육박하는 관현악단과 응원단을 파견해 한국의 ‘쇼’를 북한 것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미국 부통령 마이크 펜스의 표현을 빌리면 북한에 의한 평창 올림픽의 하이재킹이다.
 
김정은이 개·폐막식에 여동생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과 김영철 당 중앙위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을 보낸 것은 올림픽 이후를 시야에 둔 전략적 판단에서다. 김여정은 김정은의 문재인 대통령 방북 초청을 전달했다. 대남 정책의 총책임자인 김영철은 문 대통령, 서훈 국정원장, 조명균 통일부 장관과 만나 정상회담을 포함한 남북대화와 북미대화의 조건과 절차를 논의했을 것이다. 김영철이 방남 중 몇 차례나 북한이 미국과 대화할 “충분한 용의가 있다”고 말해 평창 이후의 남·북·미 대화 전망의 기대를 높였다.
 
미국은 초강력 대북제재 일변도
 
문제는 트럼프 정부의 강경한 입장이다. 개막식에 참석한 마이크 펜스 부통령은 시종여일 북한의 김여정 일행을 투명인간으로 취급하고 북한을 자극하는 행보로 일관했다. 특히 김여정과의 청와대 회담이 2시간 전에 북한의 취소 통보로 무산된 것은 안타까운 기회의 상실이다. 북한은 펜스 부통령의 언행을 보고 만나 봐도 펜스의 입에서 나올 말이 뻔하다는 판단에서 회담을 불쑥 철회한 것으로 보인다. 펜스 부통령은 올림픽 개막 전야의 만찬장에서도 김영남·김여정과 같은 자리에 앉기를 거부하고 퇴장했다. 그건 대국의 정치인에게 어울리는 행동이 아닐 뿐 아니라 만찬 호스트인 한국의 대통령에 대한 결례이기도 하다.
 
트럼프가 폐막식에는 개막식에서의 펜스의 철권 이미지와 대조되는 딸 이방카 백악관 고문을 보내 북한 김영철 일행과의 접촉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낳았다. 그러나 이방카는 상냥하게 웃는 얼굴로 한미동맹의 중요성과 대북 초강력 제재의 필요성만 강조했다. 문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남·북·미 접촉과 회담에 관한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트럼프는 이방카 방한 중에 대북 해상 차단이라는 ‘역대 최강’의 독자 제재까지 발표했다. 그것은 평창 이후 문 대통령이 풀어야 할 참으로 어려운 도전 과제다.
 
김정은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평창올림픽을 민족의 행사라면서 최고위 대표단과 화려한 관현악단·응원단을 보냈는지에 대해서는 진영에 따라 의견이 갈린다. 한국과 미국의 보수 진영은 김정은이 평창에서 평화 메시지를 발신해 대북 제재의 완화를 유도하고 한미동맹을 이간하려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부소장 마이클 그린 박사도 김정은의 의도는 국제 제재 완화와 한국과 미국 사이에 쐐기를 박는 것(drive a wedge)이라는 논평을 필자에게 보내 왔다.
 
평창이 준 절호의 기회 살려야
 
그러나 김정은의 평창 올인을 위장 평화공세라고 일축해 버리면 평창이 제공한 드문 기회를 날려버리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 체임벌린과 달라디에가 히틀러의 위장 평화공세에 넘어간 것은 전쟁 혐오와 평화에 대한 갈구가 지나쳐 히틀러의 전쟁 준비를 간과하고 자체의 전쟁 준비를 게을리한 탓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방심하지 않는다. 북한의 핵·미사일로 인한 실존적 위기를 충분히 자각하고 있다. 히틀러 때의 유럽과는 달리 우리의 대북 억지력은 최고 수준이다. 김정은이 평창에서 휘두른 올리브 가지가 위장일 가능성에도 충분한 대비를 하고 있다.
 
김정은은 스스로 자랑한 핵·미사일 개발 완성으로 확보한 억지력을 배경으로 복심들을 평창에 보낸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의도를 정확히 아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사이 우리는 체제 경쟁에서의 승리, 도덕적 우위, 확고한 억지력,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대북 제재에 의지해 김정은에게 ‘신뢰의 도약(leap of faith)’을 발휘해 줄 정도의 여유는 있다고 생각한다. 신뢰의 도약이란 철회의 길을 열어 놓고 실용적 목적을 위해서 상대를 일단 믿어 주는 것이다. 김정은의 ‘딴 마음’이 들키는 즉시 신뢰를 거둬들이면 된다.
 
한·미, 북한 비핵화 해법 달라
 
평창에서 뿌린 씨앗을 평화의 거목으로 키우는 것이 문 대통령에게는 무거운 역사적 짐인 동시에 노벨평화상까지 갈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다. 한여름 밤의 꿈 같은 평창올림픽이 세계인의 갈채 속에 성공적으로 끝난 지금 우리는 당장 북핵이라는 엄혹한 현실에 마주쳤다.
 
북한 비핵화의 목표는 같아도 그 해결 방법에서 서울과 워싱턴의 거리는 멀다. 문재인 정부는 북한에 최대의 압박을 가하면서도 동시에 정상급 회담을 포함한 남북대화와 북미대화를 통해서 북핵 해결의 문을 열자는 입장이다. 트럼프 정부는 북한이 신뢰할만한 비핵화의 의지를 보이지 않는 한 필요한 것은 북미대화가 아니라 지속적이고 점증적인 압박이라는 입장이다.
 
김정은이 올림픽 폐막식에 대남 총책 김영철을 보낸 것은 평창 활용에 대한 김정은의 굳은 의지를 나타낸다. 야당은 김영철이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의 배후인물이라고 그의 방남을 강력히 반대한다. 그러나 통일부는 대승적 차원에서 그의 방남을 받아들이자고 말한다. 통일부의 말이 더 현실적이다. 꿩 잡는 게 매다. 남북 접촉과 북미 접촉을 통한 북핵 해결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북한의 대남정책을 총괄하고 김정은의 신임이 두터운 김영철 같은 사람과 앞으로의 남북관계와 북미관계, 그리고 핵 문제의 해결 방안을 논의하는 것이 실권 없는 사람과의 대화보다 효과적이고 시간도 아끼는 길이다.
 
문 대통령, 북·미 접점 찾아야
 
트럼프 정부는 평창에 펜스 부통령과 딸 이방카를 보내 남북대화의 과속 질주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그러나 트럼프 정부도 북한과의 대화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작년 7월 북한 여행 중 대학생 오토 웜비어가 혼수상태로 귀국해 사망하기 전 몇 달 동안 미국과 북한은 결과가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접촉을 진행하고 있었다. 펜스와 김여정의 면담이 갑작스럽게 취소됐다면 그 반대로 갑작스러운 북미 접촉도 있을 수 있다. 최대의 압박에는 대화의 문이 열려 있어야 한다. 평창 같은 기회는 쉽게 오지 않는다.
 
미국과 북한은 평창에서 한국 대통령을 매개로 간접 대화를 했다. 그 결과 남북한과 미국은 이제 상대방의 대화 조건, 대화를 통한 북한 비핵화의 로드맵의 윤곽을 알았다. 문 대통령에게는 북한의 북미대화 용의와 미국의 적절한 조건 사이의 거리를 좁히고 접점을 찾아야 하는 무거운 짐이 지워졌다. 북한으로부터는 미국이 요구하는 비핵화의 의지를 약속받고, 미국으로부터는 북한이 인식하는 적대 정책의 변화를 유도해 내는 데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김영희 전 중앙일보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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