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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읽기] 오십 년 동안의 합동 세배

중앙일보 2018.02.28 01:56 종합 28면 지면보기
문태준 시인

문태준 시인

설날에 시골집에 다녀왔다. 내 시골 동네에는 마흔 가구 정도가 산다. 사방으로 멀고 가까운 산이 겹겹으로 에워싸고 있어 손바닥을 안쪽으로 오므린 것처럼 오목한 곳에 앉은 동네다. 내 동네 사람들은 대부분 경북 김천시 봉산면 태화2리에서 나고 자라 평생을 산다. 외지로 나가 살던 분들도 별세를 하면 동네의 깊고 푸른 산으로 돌아와 영원히 잠든다. 밤사이에 일어난 일들은 동이 트기도 전에 다 알려지는 곳이요, 눈빛으로도 마음을 읽는 곳이요, 서로의 형편을 잘 알아 궁색한 집이 있으면 내 집의 사정을 뒤로 미루고 그 집을 먼저 도와준다.
 

행복은 타인에 대한 환대와 공감에서 출발
나만을 애지중지 하는 사람은 외로울 뿐

논과 밭에 들밥이 나가면 들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밭두렁에 모여앉아 밥을 나눠 먹는다. 저수지의 물을 괴고 흐르게 하는 일을 상의하고, 우물의 물을 공동으로 사용한다. 크게 보아서는 한 식구나 다름이 없다. 요즘은 농사일이 바쁘지 않아 아직은 겨를이 있는 때여서 어른들은 마을회관에서 함께 점심과 저녁을 지어 드신 후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주무신다. 내 어릴 적에도 그랬고, 지금의 때에도 골목에서 서로 만나면 밥을 드셨느냐는 인사를 첫말로 주고받는다.
 
그런데, 내 시골 동네에서는 설날이면 치르는 작은 행사가 있다. 합동 세배가 그것이다. 설날 점심 무렵이 되면 이장이 안내 방송을 한다. 그러면 동네 사람들이 시간에 맞춰 마을회관으로 모여든다. 길게 줄지어 늘어서서 웃어른들께 세배를 올리고, 최고령인 노인회 회장님으로부터 새해 덕담을 청해 듣는다. 이장은 동네의 크고 작은 일들 가운데 꼭 알릴 일을 말하고, 자녀들 가운데 진학이나 취업 등의 소식이 있으면 그 자리에 당사자가 참석해 축하를 받는다. 그러고는 음식들을 차려내 먹으면서 서로 얘기를 나눈다.
 
마음읽기 2/28

마음읽기 2/28

합동 세배에는 타지에 나가서 살다 명절을 맞아 귀향한 사람들도 자리한다. 고향에 찾아온 사람의 손을 잡고 서로 그간의 안부를 묻는다. 매일매일 골목과 들에서 만나는 사이일지라도 새해의 인사를 새롭게 나눈다. 또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비는 말을 나눈다. 내 시골 동네에서의 합동 세배의 전통은 유래가 오래되었다. 팔순을 맞은 내 아버지의 말씀에 따르면, 아주 예전에는 어른들께 세배를 하러 집집이 직접 찾아다녔다고 한다. 아버지께서 결혼한 그 이듬해부턴가 합동 세배로 바뀌었다니 못해도 한 오십 년은 족히 된 듯하다.
 
어쨌든 얼굴을 마주 대하고 정담을 나누는 이 행사는 요즘 시대에는 드문 일일 것인데, 나는 이 소박한 행사를 꽤 의미심장하게 생각한다. 마을 공동체를 이루며 생활하는 다른 사람이 편안하게 잘 지내고 있는지를 거듭해서 묻고, 나의 친밀감을 겸손하게 드러내고, 무엇보다 우리의 마음속 깊이 빛처럼 품고 있는 사람에 대한 관심과 연민의 마음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나는 영국의 BBC가 2005년에 작은 도시 슬라우에서 3개월간에 걸쳐 벌인 심리 실험 결과를 흥미롭게 본 적이 있다. 그 실험을 통해 제시한 행복을 위한 수칙 가운데 유심하게 본 수칙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관한 항목들이었다. 그동안 떨어져 지냈던 사람과 만날 약속을 잡을 것, 매일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풀 것, 하루에 한 번 이상 낯선 사람에게 미소를 짓거나 인사를 할 것 등이 행복의 조건이었다. 다른 사람들과의 좋은 관계 만들기와 다정한 대면 접촉을 강조한 이 조건들은 매우 이채로웠다. 왜냐하면 나의 행복이 나에 의해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사람에 대한, 심지어 초면인 사람에 대한 나의 환대와 공감의 능력을 통해서 이뤄질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을 인간적으로 친절하게 대면하면 할수록 나의 행복도 그만큼 커진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나만을 애지중지하는 사람은 외로운 사람일 것이다.
 
박목월은 시 ‘내년의 뿌리’에서 “사람의/ 따뜻한 체온을/ 생각한다./ 인간이 인간을 맞아들이는/ 가볍게 열리는 문./ 조용한 음성과/ 부드러운 눈빛./ 안온한 교환과 거래./ 의지와 신뢰./ 사위(四圍)는/ 눈으로 덮이고/ 날카로운 산줄기는/ 이어져 땅끝으로 사라져 간/ 처절하게 적막한/ 지역에서/ 인간의 따뜻한/ 체온을 생각한다.”라고 노래했다. 이 시를 통해 박목월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방문과 부드러운 맞아들임을 강조했다.
 
우리는 다른 존재와 단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연결되어 있다. 물건을 교환할 뿐만 아니라 나와 당신은 호의를 주고받는다. 나는 나와 당신의 행복을 동시에 기도한다. 나와 당신은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나는 곧 당신이다. 나와 당신은 하나의 존재이다. 내 시골 마을에서 설날에 치러져 온 합동 세배의 전통이 나에게 가르쳐주는 것도 바로 이러한 사람에 대한 영접과 신뢰와 유대의 가치가 아닐까 한다.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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