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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2035]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중앙일보 2018.02.28 01:55 종합 28면 지면보기
홍상지 사회부 기자

홍상지 사회부 기자

1. 대학생 시절 우리 과에는 ‘홀수 학번이 예쁘다’는 소문이 돌았다. 후배들이 들어올 때마다 선배들은 “이번 학번 애들은 총체적 난국이다” “저 친구는 어디 아프게 생겼네” 등의 얼굴 평가, 일명 ‘얼평’을 해댔다. 나 역시 얼평의 피해자이자 방관자였다. 씁쓸해도 그냥 같이 웃는 걸 택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2. 대학교 2학년 때쯤 교수님과 학생들이 같이 술을 마셨다. 술자리에서 교수님은 계속 예쁘장한 여자 후배를 데려오라고 했다. 다들 “또 시작이네” 하면서도 그 후배에게 교수님이 찾고 있다는 전화를 걸었다. 후배는 서둘러 도착해 교수님 옆에서 술 시중을 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이 먹어서 진상이다’라고 생각했지만 침묵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3. 입사 후 첫 출입처에서 만난 타사 선배는 종종 취재원과의 저녁 자리에 날 불렀다. 그러다 점점 도를 넘는 수준의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선배는 한밤중에 자주 전화를 걸어 술자리에 오라고 요구했고 “늦어서 안 된다”고 하면 “너희 동네로 갈 테니 둘이 한잔하자”고 졸랐다. 그는 유부남이었다. 매번 거절하는 게 일이었다. 주위 여자 선배들은 ‘원래 그런 인간’이라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고부터 마주칠 일 자체를 만들지 않으려고만 애썼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4. 4년 전 한 회사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던 친구가 ‘정규직’인 남자 선배와 지방 출장을 갔다. 일을 마친 뒤 방에서 쉬고 있는데 남자 선배로부터 잠깐 ‘자기 방에 오라’는 문자가 왔다. 친구가 찾아간 방에서 남자는 강제로 스킨십을 시도했다. 필사적으로 친구가 저항하자 그가 따졌다. “이럴 거면 왜 아까 나를 보면서 그렇게 웃었냐?” 친구는 내게 이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계약 기간 끝날 때까지만 남자를 최대한 피해 다니려 한다”고 말했다. 애석하게도 나 역시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5. 생각해보니 살면서 단 한 번도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적이 없었다. 피해자로서든, 그걸 방관하는 가해자로서든 말이다. 사실 ‘미투’ 이후가 벌써 걱정이다. 여론의 관심이 사그라지면 명예훼손으로 피해자를 역고소하거나 조직 내에서 고립시키는 가해자들의 소름 끼치는 작태를 그동안 너무 많이 봐와서다.
 
수없이 자책하고 또 용기를 내는 건 왜 늘 피해자의 몫일까. 들리는 이야기로는 요즘 ‘미투에 지목될까 봐’ 불안해하는 분이 많다고 한다. 이분들이 더 많이, 오랫동안 불안으로 고통받았으면 좋겠다. 고통 속에서 진심으로 반성하길 바란다. 이번에는 정말 그래야 한다.
 
홍상지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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