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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성폭력 신부가 회개할 장소는?

중앙일보 2018.02.28 01:54 종합 29면 지면보기
백성호 지식팀 기자

백성호 지식팀 기자

최근 불거진 한만삼 신부의 성폭력 사건은 ‘개인적 사건’이 아니다. 성직자 신분으로 행해진 권력형 성폭력이자 엄연한 ‘사회적 사건’이다. 그럼에도 천주교가 가해자인 한 신부의 ‘방패막이’ 역할을 하는 건 아닌지 우려된다.
 
한 신부는 7년 전 아프리카 수단에서 선교 봉사차 온 여성 신도에게 상습적 성폭력을 행사했다. 23일 보도가 터져 나오자 한 신부는 곧장 짐을 싸 지방으로 피신했다. 천주교 수원교구는 “지방으로 내려가 회개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25일 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 명의로 사과 서한을 발표했지만, 한 신부에 대한 징계위원회 개최나 사제직 박탈 등에 대한 논의 여부는 일절 없었다. 대부분 ‘말로만 하는 사과’였고, 그나마 실질적인 조치는 ‘사제를 대상으로 하는 의무적 성폭력 예방교육’ 정도에 불과했다.
 
취재일기 2/28

취재일기 2/28

수원교구의 언론 취재 창구는 아예 막혀 있다. 한 신부가 주임신부로 재직하던 성당의 평신도회는 토요일인 24일 “일요 미사는 없다. 3일 정도 보도거리가 없으면 이슈가 잠잠해질 것”이라며 전체 신도에게 문자를 돌렸다. 취재를 막기 위해 일요 미사를 취소한 게 아닌가 의혹이 제기되는 이유다. 수원교구가 한 신부의 성폭력 사건을 ‘지나가는 소나기’쯤으로 인식하고 있다면 큰 오산이다.
 
한 신부는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운영위원이었다. 핵심 멤버다. 25일 발표한 정의구현사제단의 사과문도 마찬가지다. 각종 사회적 이슈에 대해 거침없이 발언하던 정의구현사제단도 성폭력 가해자가 된 내부 구성원에 대해서는 징계 관련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피해 여성에게 사제단의 이름으로 용서를 청했다.
 
나는 정의구현사제단의 사과문을 몇 번이나 읽었다. 천주교에서 사제와 평신도의 현실적 관계는 결코 수평적이지 않다. 정의구현사제단은 사제단 공동의 이름으로 용서를 청하는 게 피해 여성에게 ‘무언의 압박’이나 ‘강한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정말 모르는 걸까. 아니면 알면서도 일부러 행간에 녹여 넣은 걸까. 읽을수록 헛갈린다. 피해자를 위한 사과문인지, 가해자를 위한 사과문인지 말이다.
 
교회법상(제1395조 2항) ‘힘이나 협박으로 범한 성직자는 제명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다. 한 신부가 진정으로 회개를 원한다면 지방의 은신처가 아니라 경찰서 조사실로 가야 하지 않을까. 그게 피해 여성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가 아닐까. 그의 성범죄 공소시효는 아직도 3년 남았다.
 
백성호 지식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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